독립운동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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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을 통한
독립운동 -
영덕철물점은 종업원이 50여 명에 이르도록 번창했다. 사업가 김상옥은 일본상품 배척운동을 전개했다.
단발령(1895년) 이후 모자를 쓰게 되자 비싼 일제 모자가 판을 쳤다. 김상옥은 1917년 일제 모자를 대체할 ‘말총모자’를 창안, 생산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오늘날 노동조합과 같은 ‘공인조합(工人組合)’을 결성하게 하여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는 건전한 노사문화를 선도 하였으며, ‘동업조합(同業組合)’을 결성하여 사업을 통해 나라를 되찾는 길을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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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참여하고
여학생을 구하다 -
1919년 3월 1일 직공들과 3∙1운동에 참여하고, 동대문 앞에서 한 여학생이 헌병에게 추격을 당하는 것을 보고 비호처럼 달려들어 헌병을 거꾸러뜨리고,
여학생을 구했다. 이때 헌병이 버리고 달아난 장검이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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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에 본격 투신,
혁신단, 암살단 활동 -
그전부터 '광복단', ‘백영사’에 깊이 관여해 왔으나, 3.1운동을 계기로 1919년 4월 1일 청년학생들과 함께 ‘혁신단’을 조직하고, 『혁신공보』라는 비밀신문에
독립운동 소식을 담아 시중에 전파했다. 일제의 끈질긴 추적으로 이 일이 한계에 이르자 더 강력한 투쟁방법으로 일제 중심부를 직접 타격할 ‘암살단’을 조직했다.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이 방한하는 때를 맞추어 총독 처단, 조선총독부 등 기관 파괴, 종로 시가전 전개 등의 대담한 계획을 수립하고 준비하였으나,
거사 직전 발각되어 급히 몸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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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활동 -
수개월간 일제의 추적을 피해 몸을 숨기고 있던 김상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탈출했다. 상해에서 김구를 비롯하여 이시영, 조소앙 등의
임시정부 요인들과 진과부(陳果夫)를 비롯한 장개석 총통(蔣介石 總統)의 국민당 정부 고위 인사들과 교류하며, 독립자금을 모금하고 적대자들로부터 임시정부를 옹호했다. 손문의 『삼민주의』(三民主義), 『오권헌법』(五權憲法),『조선혁명선언급한살임정강』(朝鮮革命宣言及韓薩任政綱) 등 많은 독서와 사격연습을 하며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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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당(한살림당)
혁명사령부장 -
1922년 4월 김상옥은 상해에서 한당(韓黨) 혁명사령부장으로 선임되었다. 한당은 조소앙이 창설한 ‘한살림당’(韓薩任黨)을 말한다.
김상옥은 조소앙과 인류평등, 세계 대동(大同) 등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김상옥이 “이렇게 길게 칩거하면서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앉아서 탄식하기보다는 움직이며 때를 만드는 것이 낫겠다.”고 하자 이 직책을 주면서 국내에 들어가 뜻을 실현하도록 격려했다.
김상옥은 상해를 떠날 결심을 하며, “죽고 사는 것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있습니다. 만약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다음 세상에서 서로 만납시다.
나는 차라리 뜻을 깨끗하게 지키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