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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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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1세

출생

1월5일 서울 동부 건덕방 어의동, 현 종로구 대학로 36-8(효제동 72)에서
구한말 군관 김해 김씨 귀현(貴鉉)과 양주 김씨 점순(点順)여사의 사이에 3남1녀 중 2남으로 출생.

18968세

소년 노동자 시작

부친 김귀현이 운영하는 체(얼개미) 제작소에서 소년노동자로 일을 하기 시작함.

190314세

대장간 일 시작

대장간에서 일을 시작함. 이때 이지호(李之鎬) 노인에게 한문을 배움.
이웃으로 옆집에 살던 이혜수 동지 가족이 다니는 연동교회에 다니기 시작함.

190516세

신군야학 설립

동대문교회 입교, 신군학교에 신군야학을 조직하여 불우청소년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며 자신도 공부를 함.

190718세

동흥야학(東興夜學) 설립

동흥학교에 동흥야학을 설립하여 불우청소년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며 자신도 공부함.
이후 어의동보통학교에 흡수되며 김상옥은 어의동보통학교에서 수학하게 됨. 어의동보통학교는 1941. 4. 1 공립효제국민학교로 이름이 바뀜.

191122세

YMCA 청년부장으로 활동

21세에 기독교청년회관 영어반을 수학하고 황성기독교청년회관(YMCA)체육교사
이필주(후에 정동제일교회담임목사, 민족대표33인) 지도하에 청년부장 활동, 미국유학을 꿈꿈

191223세

영덕철물점 개점

기독교 권서인이 되어 지방으로 다닐 때 약품행상을 겸하여 번 돈으로 창신동 493번지에서 3형제가 영덕철물점을 개업함. 영덕철물점은 이후 독립항쟁의 비밀본부가 됨.

191325세

대한광복단 조직

3월에 경북 풍기에서 채기중, 한훈 등과 ‘대한광복단’ 조직.
10월 동대문교회에서 정진주(鄭眞珠)와 결혼

191627세

조성헌병대 기습

한훈, 유장열 등과 전남 보성군 조성면의 조성헌병대를 기습, 무기를 탈취하고 반민족분자 2명 처단

191728세

일본상품 배척과 민족경제운동, 백영사 조직

일본상품 배척을 목적으로 말총모자 창안, 양말, 장갑, 농기구 등 생활용품을 생산, 직공을 위한 '공인조합'을 만들어 권익을 보호, '동업조합'을 조직하여 일본상권에 대항,
경영주들의 결속을 도모함. 이종소, 임용호, 김동계, 손정도 목사(후에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등과 ‘백영사’를 조직하여 사회계몽과 인재양성 사업을 하였으며,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일본어사용금지, 금주, 금연운동전개

191829세

영덕철물점이 크게 번창

창신동 487번지에 2층 신축, 철물점 옆 경성부 소유 약 150평을 임차하여 마방(馬房)으로 활용

191930세

3.1운동 참여

3.1운동 발발을 알고 직원들에게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주어 만세시위에 참여시키고 자신도 탑골공원 독립선언식을 참관하고 시내 만세시위에 참여함.
오후 돌아오는 길에 동대문 근처에서 일본헌병에게 쫓기는 여학생을 구출하고 일본도를 노획함.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 전시)

혁신단 조직

3.1운동의 지속과 확산을 위해, 4월1일 동대문교회 피어슨 여사 집에서 항일비밀 결사인 ‘혁신단’ 조직, <혁신공보>를 발행하여 민족의식 고취 및 독립사상 계몽에 전념하다 일경(日警)에 잡힘. 종로경찰서에서 40여 일간 고문/고초를 당함.

192031세

암살단 조직과   8ㆍ24 일제에 대한 총공격 추진

1월 ‘혁신단’을 중심으로 ‘암살단’을 조직하고, 8월 24일 미국 의원단 내한에 맞추어 대대적인 일제 고관 처단, 기관 파괴 거사를 추진하다 당일 오전 예비검속으로 탄로나 실패함.
그 후 2달 간 경성에서 은신하다 10월 말 만주로 망명함.

사형선고

‘김상옥사건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 받음.

제1차 국내 잠입과 제2차 망명

만주 봉천에서 의열단원 배중세, 고인덕 등과 함께 밀양에 잠입, 거사용 폭탄을 제조해 주고 다시 만주로 감.

192132세

김원봉, 조소앙과의 만남

김원봉 등과 의열단 재조직에 관여하고, 상해로 가서 조소앙과 만나 일생의 동지가 됨. 상해 임정요인 김구, 이시영, 조소앙, 조완구, 신익희 등과 임시정부 독립자금(軍資金) 모금을 계획, 무기를 휴대, 국내로 잠입하여 서울, 충청, 전라 등지에서 자금 모금 후, 김상옥 사건으로 고문을 받아 병중에 있던 장규동 동지를 구출하여 상해로 돌아옴.

192233세

최후의 단판 승부를 위한 국내 잠입

4월 한당韓黨(=한살림당韓薩任黨)혁명사령부장으로 선임됨. 11월 임정 요인들과 총독주살 및 ‘총독부 폭파’거사 협의 후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권총 3정, 신익희로부터 권총 1정, 임시정부 등에서 폭탄 6개(대형 4개 소형 2개) 및 실탄 800발을 받아 안홍한을 대동, 12월 초 서울에 잠입. 암살단 동지를 재규합, ‘한당 서울혁명사령부’를 삼판통(현 후암동) 은신처인 매부 고봉근 가()에 두고, 거사를 준비함.

192334세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1월12일 독립운동 탄압 본거지인 종로경찰서 폭파, 일경 및 일본기관지 매일신보 사원 등 10여명 중경상자를 내며 일제(日帝)의 간담을 서늘케 함.

삼판통 격전과 신출귀몰한 탈출

일본의회에 참석차 동경(東京)에 가는 사이토 총독을 서울역에서 처단코자 은신중 1월17일 은신처에 일본 형사대 21명이 기습, 총격전에서 4명 처단(1명 사살, 3명 중경상), 일본 군경 1,000여 명이 포위한 대설 쌓인 남산을 종단 탈출, 왕십리 안정사에서 승복을 빌려 변장하고, 짚신을 거꾸로 신고, 수유리 이모댁으로 피신, 휴식 후 시내 잠입

일대천 효제동 시가전과 최후의 전투

1월22일 효제동 생가(72번지) 옆 이혜수 동지댁(73번지)에 은신, 동상 치료 중 적() 군경 1,000여명이 삼엄한 경계 속 4중 포위하자 2정의 권총을 양손에 쥐고, 생가 주변 다섯 집(효제동 72, 73, 74, 75, 76-2번지)을 넘나들며 3시간 여 혈전 끝에 적 16 여명 이상 처단, 마지막 남은 1탄으로 자결 순국 (34세)

1962

3. 1.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2등급)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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