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원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페이지 정보
등록일 : 26-05-14 조회 : 438본문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유기원(柳基元, 1898 ∼1986)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
1. 성장기와 민족의식 형성 (1898~1919년 2월)
유기원은 1898년 1월 1일 경기도 파주군(坡州郡)아동면(衙洞面)검산리(檢山里)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 그는 중앙학교에(中央學校)서 근대 교육을 받으며 신학문을 익혔고, 이 과정에서 점차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1919년 3월 중앙학교를 졸업할 무렵, 국내에는 독립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는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 3·1운동 참여와 지하 언론활동 (1919년 3월~1919년 12월)
1919년 3월 1일, 유기원은 서울 탑골공원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을 외쳤다. 이후 그는 보다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항일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지하신문 발행 활동에 적극 나섰다.
그는 3월 중순부터 배운성, 장한준 등과 함께 『독립신문』을 인쇄·발행하였으며, 이어 『자유민보』를 『혁신공보』로 개칭하여 발행하고 이를 서울 계동 일대에 배포하였다. 또한 동창생 박민오로부터 『자유신종보』(또는 『자유농종보』)의 원고를 받아 종로의 민가에서 등사기로 인쇄·배포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비밀 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사상을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결국 일제 당국에 발각되었고, 그는 체포되어 1919년 1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며 항일운동의 대가를 감내하였다.
3. 일본 유학과 귀국 (1920년대 초~1923년)
출옥 후 유기원은 학문을 통해 역량을 키우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1923년 발생한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일본 사회가 극도로 혼란에 빠지면서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워졌고, 그는 귀국하게 되었다.
4. 미국 유학과 해외 독립운동 (1924년~1931년)
유기원은 1924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디트로이트, 오하이오 등지에서 약 7년간 유학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단순한 학업에 머무르지 않고, 미주 한인사회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1928년에는 뉴욕에서 윤홍섭, 장덕수, 윤치영 등과 함께 『삼일신보』 창간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 신문은 해외 한인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조국의 현실을 알리는 중요한 매체였으며, 유기원은 이를 통해 국제적 차원에서 민족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5. 귀국 이후 활동과 재차 검거 (1931년)
1930년대 초 귀국한 유기원은 국내에서도 항일운동 관련 인물들과의 연계를 이어갔다. 1931년에는 ①조선공산당 ML당 책임비서 김세연이 국내에 머물 당시, 파주 자택을 은신처로 제공하였다.
이 사실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면서 그는 다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같은 해 11월 불기소로 석방되었다. 이는 그의 활동이 여전히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① 조선공산당 ML당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운동 세력 가운데 하나로, 일반적으로 “ML파”, “통일조선공산당”, “3차 조선공산당”으로도 불립니다. 여기서 ML은 마르크스(Marx)·레닌(Lenin)의 약칭입니다.
조선공산당의 기존 화요파 중심 조직이 1926년 6·10만세운동 사건 이후 대대적인 검거로 붕괴되자, 여러 사회주의 계열 세력들이 재통합을 추진하며 등장한 조직이 바로 ML당입니다.
1926년 12월 6일 열린 조선공산당 제2차 당대회를 계기로 ML파 세력이 당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으며, 이 시기의 조선공산당을 학계에서는 “통일조선공산당” 혹은 “ML당”이라고 부릅니다.
6. 평가와 서훈
유기원의 독립운동은 무장투쟁보다는 지하신문 발행과 언론 활동, 그리고 국내외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사상 확산에 중심을 두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는 3·1운동 이후 국내에서의 비밀 출판 활동과 해외에서의 언론 활동을 통해 일관되게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1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