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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서병두(徐丙斗)선생, 인장에 새긴 항일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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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5-08-14 조회 :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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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서병두(徐丙斗)선생, 인장에 새긴 항일의지

서병두(徐丙斗) 선생은 한성부 출신의 인장 조각가로, 전문 기술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친 애국지사이다. 본관은 이천으로, 경성부 낙원동에서 인장 조각업에 종사하던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의열단의 비밀임무를 수행하며 항일투쟁의 최전선에 섰습니다.

 

1. 한성부 출신 인장조각가의 삶과 독립운동 참여

1879219일 한성부(漢城府, 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이천입니다. 경기도 경성부 낙원동에 거주하며 인장 조각업에 종사하였는데, 이 직업적 특성을 활용해 1920년대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과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투탄 사건에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2. 대한독립구국단 가입과 비밀결사의 군자금 모집 활동

192011, 정인호의 권유로 대한독립구국단에 가입하여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구국단은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 지원을 목적으로 조직된 비밀결사로, 중국 상인을 통해 군자금을 모집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특히 일본군의 간도출병 소식이 전해지자, 군자금 모집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습니다.

 

3. 임시정부 문서 인쇄와 체포

192011월 정인호 집에서 이종만과 함께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명의의 군자금 납입명령서(納入命令書)’와 영수증 용지 수십 매, 임시정부의 국민의회 의원선임장(國民議會 議員選任狀)’ 수십 장을 인쇄하였다. 납입명령서 등에서는 한국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 인민은 의무로 군자금을 제공해야 한다.”라는 취지가 기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11219일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넘겨졌다. 19222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8월 임시 출옥 후에도 곧바로 항일운동에 복귀하였습니다.

 

4. 의열단과의 협력, 김상옥 의거 지원

192212월 중국 상하이의 의열단(義烈團) 단장 김원봉(金元鳳)의 지시로 국내에 폭탄을 반입하려는 김한(金翰정설교(鄭卨敎윤익중(尹益重) 등과 협력하여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20일 자택에서 윤익중으로부터 한국 독립에 관한 격문과 독립운동 자금 영수증 용지 등의 인쇄를 의뢰받았다. 1223일에는 전우진(全宇鎭)으로부터 그 모형을, 28일에는 윤익중으로부터 그 비용 20원을 받아서 문서를 인쇄하고 인장(印章)을 조각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1923112일 밤 김상옥이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항일 서울시가 전투를 벌인 사건과 관련되어 있었다.

 

5. 재판과 수감, 그리고 끝없는 항일 의지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19233월 김한·윤익중·전우진·정설교 등과 함께 기소되었다. 같은 해 5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위반과 강도예비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검사가 항소를 제기하였다. 같은 해 10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6. 국가의 추서

대한민국 정부는 1992,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습니다. 서병두 선생은 인장이라는 작은 도구를 항일투쟁의 무기로 바꿔, 조국 독립에 헌신한 불굴의 투사였습니다.

 

참고: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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