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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최영만 선생, 해외에서 독립 언론을 창간하고 국내에서 의열 투쟁을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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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5-07-21 조회 : 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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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동공보   1907년 3월 21일, 국권 회복을 위한 대동보국회 조직에 참여, 기관지 대동공보 발행 )


독립운동가 최영만 선생, 해외에서 독립 언론을 창간하고 국내에서 의열 투쟁을 지원

최영만 선생은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조국의 현실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국권 회복을 위해 투신한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는 해외에서 한인 동포들의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언론 활동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국내로 돌아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며 목숨을 건 의열 투쟁의 자금 확보에 기여하는 등 치열한 삶을 사셨습니다.

 

 

탄생과 시대의 부름

최영만 선생은 1885816일 평안남도 평양 신창리에서 태어났습니다.이후 서울 운니동에 거주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할 뜻을 품었습니다. 그는 19071월 태극학회에서 운영하던 태극학교에 입학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했습니다. 또한 일본으로 유학하여 메이지대학에서 약 1년간 수학하는 등 신학문을 접하였고, 귀국 후 순사로 복무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형성된 그의 식견과 경험은 훗날 그의 독립운동 역량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해외에서의 항일 투쟁, 언론과 경제로 국권을 회복하다.

최영만 선생의 초기 독립운동은 해외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해외 최초 한글 신문 신조신문번역 및 활동 (1903-1904):1903년 평안북도 운산에 위치한 미국인 경영 운산광산에서 근무하던 선생은, 1904년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로 건너갔습니다. 그해 327일 해외 최초의 한글 신문인 신조신문의 번역을 맡아 하와이 동포들의 지식 보급과 문맹 퇴치에 앞장섰습니다. 또한 대한자강회 하와이 지부에 가입하는 등 구국 운동에 참여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국권회복 위한 대동공보창간 및 무역 회사 설립 (1907-1910):이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선생은 190732,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조직했습니다. 그해 103일 문양목(文讓穆)과 함께 기관지대동공보를 창간하고 주필로 활동하며 독립 언론인으로서 민족의식을 고취했습니다. 대동공보는 미국 14개소, 국내 11개소, 중국 상하이 1개소 등에 보급소를 마련하여 국내외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전파했습니다. 나아가 1910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 물산을 무역하기 위해 대동보국회 회원을 주축으로 한미무역회사(韓美貿易會社)를 설립하고 총무로 활동하며 경제적 실력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그해 712미국 물품은 국내로 수입하여 동포의 물품 제조를 발달케 하며 국내 물품은 외국에 수출하여 거대한 이익을 얻게 하자는 취지로 귀국했으나, 일제의 강제 병합으로 다시 도미(渡美) 허가를 얻지 못하여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국내 활동과 임시정부 지원: 목숨을 건 자금 확보 투쟁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국내에 발이 묶인 최영만 선생은 조국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임시정부 지원 및 격문 배포 계획 (1919):1919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귀국한 명제세(明濟世)를 비롯하여, 조만식(趙晩埴김영로(金永魯) 등과 함께 그해 10월 서울에서 여러 차례 회합을 가졌습니다. 이들은 이후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해 격문을 배포하고, 독립운동 자금 모집 등에 종사할 것을 결의하며 국내외 연락망 구축에 힘썼습니다.

독립 기념 시위 및 공채 모집 계획 (1920):19201월 말경, 조만식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 등을 만나 협의한 결과, 그해 31일을 기하여 서울에서 독립 1주년 기념 축하 시위 운동을 거행하고 임시정부에서 송부해 온 인쇄물을 민중에 배부하며, 임시정부 발행 공채 증권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할 것등을 결의했습니다. 2월 조만식이 돌아온 후, 최영만 선생은 명제세 등과 함께 임시정부 발행 공채 증권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할 계획을 추진했습니다. 5~6월에는 변호사 박승빈에게 독립운동 자금 제공을 요구하는 등 적극적인 자금 확보 활동을 벌였습니다. 또한 연락 기관으로 가운송점(假運送店)을 서울과 안둥현(安東縣)에 설치하기 위한 자금 모집도 시도했습니다.

판결문 속 의열 활동의 증거:선생의 이러한 활동은 일제 판결문에도 기록되어 그 정당성과 치열함을 입증합니다. 판결문은 "최영만이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암살단을 조직하여 해당 운동의 방해가 되는 조선인 형사 등을 살해하고, 또한 미국 의원 등이 입성할 때 총독, 정무총감, 기타의 대관을 남대문역에서 총살하고, 그 기회를 타고 군중을 선동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소요를 야기할 것을 계획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인 부호에게 군자금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살해하겠다는 경고문 및 암살단 취의서 약 3천매를 대정9(1920) 4월 중에 인쇄했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제의 부당한 탄압과 불굴의 옥고

최영만 선생의 목숨을 건 독립운동은 일제의 날카로운 감시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김상옥 의사의 암살단 조직 등과 관련하여 일제 경찰에 탐지되면서 결국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192111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위반 혐의로 징역 1(미결구류일수 중 3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습니다. 일제는 선생의 정당한 독립운동을 '질서 방해', '강도' 등의 죄명으로 둔갑시켜 부당하게 탄압했으나, 그의 조국 독립을 향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역사가 기리는 영원한 헌신

최영만 선생은 해외에서 민족 언론을 창간하고 경제적 독립을 모색했으며, 국내에서는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의열 투쟁 자금을 확보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부당한 옥고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오직 조국 독립만을 위해 싸웠던 그의 숭고한 정신과 헌신은 우리 역사 속에 길이 빛나야 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최영만 선생의 빛나는 공로를 인정하여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며 그의 위대한 삶과 희생을 영원히 기리고 있습니다.

 

참고: 국가보훈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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