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천 서울시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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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의사

일대천 서울시가 전투

일대천 서울시가 전투

1 임정요인들과 거사를 협의하고 국내로 잠입하다
1922년 임시정부는 분열과 침체에 빠져 있었다. 상해에 머물러 있는 것이 부담되었다. 독립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야 했다. 김상옥은 김구, 이시영, 조소앙, 신익희 선생 등에게 서울로 돌아갈 결심을 밝히고 권총과 탄환 및 폭탄을 준비하여 청년 안홍한(安弘翰)을 대동, 12월 초 서울에 잠입, 암살단 동지들을 재규합. ‘한당서울혁명사령부’를 삼판통(현 후암동) 은신처 매부 고봉근 가()에 두고 거사를 준비했다.
2 종로경찰서 폭파
서울에 숨어 들어온 김상옥은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 종로경찰서(현 종각역 앞 장안빌딩) 서편 경무계 사무실에 폭탄을 던지고 사라졌다.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 검거와 고문의 본산이었다.
누구도 감히 공격하리라 생각하지 못한 경성의 한복판 종로경찰서에서 들려온 폭발음은 조선의 독립운동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는 김상옥 의사의 경고이자 더 큰 거사의 신호탄이었다.
경찰은 요소요소에 비상선을 치고 검문과 경계에 돌입했다.
3 삼판통(후암동)의 새벽, 포위망을 뚫고 탈출
김상옥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이 연초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로 갈 것을 예상하고 남대문역(오늘날 서울역)과 가까운 삼판통(후암동)의 누이동생(매제는 암살단 동지 고봉근) 집에 숨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경찰이 삼판통 은신처를 탐지했다. 1923년 1월 17일 새벽 민완 형사 21명이 겹겹이 집을 포위했다. 그중 다무라(田村) 형사부장을 비롯한 4명이 집안으로 뛰어들어 방문 앞에서 항복을 명했다.
의외의 습격을 당한 김상옥은 별안간 방문을 열어젖히며 총을 쏘아 유도 4단의 다무라 형사부장을 비롯한 형사들을 쓰러뜨리고 순식간에 담을 뛰어넘어 남산으로 사라졌다. 전광석화같은 김상옥의 반격과 탈출에 모두 넋을 잃었다. 김상옥은 일본 정복순사 일천여명의 추적을 따돌리고 남산 반대편 왕십리에 있는 안장사(安藏寺/安靜寺)에 뛰어들었다. 마침 눈이 많이 내린 새벽이라 승복을 빌려 변장하고 짚신을 거꾸로 신고는 추적과 곳곳의 검문검색을 따돌리고 몸을 숨겼다.
4 효제동 은신처의 4중 포위, 3시간 동안 일대천의 대결
1923년 1월 22일 새벽, 은신 5일만에 경찰이 효제동 73번지(생가의 옆집) 이혜수 동지집 은신처를 알아냈다. 시내 4대 경찰서와 군대의 군경 1천 명을 동원하여 겹겹이 에워쌌다.
아침 날이 밝기를 기다려 형사대가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김상옥은 벽장 안에 숨어 앞에 고서(古書)를 쌓아 놓고 대응했다. 효제동 일대는 총성으로 뒤덮였다.
김상옥은 주변 형세를 알기 위해 다락 뒷벽을 차서 뚫고 담을 넘어 효제동 74번지 옆집으로 갔다. 상황을 파악한 김상옥은 다시 76번지로 넘어갔다.
그 집 주인이 뛰쳐나가 일경에게 도둑이 들었다고 소리쳤다. 김상옥은 주인 김학수를 꾸짖고는 다시 72번지(자신이 태어난 집)으로 넘어왔다.
일본 형사대는 “김상옥! 항복하라!”고 촉구했다. 김상옥은 지붕 위, 앞대문, 뒷문을 통해 공격하는 형사들을 상대하여 양손에 권총을 쥐고 대응사격을 했다.
김상옥의 총에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15~16명에 이르렀다.
5 장렬한 최후
김상옥은 오른쪽 넓적다리에 총을 맞았다. 발을 뗄 수가 없었다. 탄환도 단 세 발밖에 남지 않았다. 곧 두 발을 소모하여 마지막 한 발이 남았다. 김상옥은 “결코 항복하여 포로가 되지 않겠다.”는 결심대로 마지막 남은 한 발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상옥의 신출귀몰함과 용감무쌍함에 경찰은 상관의 명령에도 아무도 감히 시신을 확인하려 나서는 자가 없었다. 결국 어머니를 불러와 확인하게 했다.
조선총독부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경성의 한복판에서 단신으로 10일간이나 일제 경계망을 무력화시키고, 폭파와 포위망 탈출, 1천 무장경찰과 3시간이나 대치하며 치열하게 총격전을 벌여 시내를 발칵 뒤집어 놓은 예는 일제 35년 동안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6 김상옥 의사의 삶과 투쟁이 갖는 의의
  • 〮 가난한 집안의 소년 노동자에서 영덕철물점을 창업하여 성공한 사업가로 삶을 개척했다.
  • 〮 야학을 만들어 불우 청소년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자 했고, 자신도 야학과 YMCA 야간 영어반에서 공부하며 꿈을 키웠다.
  • 〮 성공한 사람에게 기대되는 사회적 의무를 스스로 찾아 행했다.
  • 〮 3.1운동에 참여하고 혁신단을 조직하고 「혁신공보」를 제작 배포하여 3.1운동을 확산시키고자 노력했다.
  • 〮 혁신단 활동이 한계에 부딪히자 포기하지 않고 일제 통치의 중심을 타격하려는 더 대담한 계획으로 암살단을 조직하는 불굴의 정신을 보여 주었다.
  • 〮 미의원단 방한을 계기로 대대적인 일제 고관 처단과 기관 폭파를 계획하는 등 끊임없이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려는 시도와 도전정신을 발휘했다.
  • 〮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공격을 막아 내며 옹호했다.
  • 〮 3.1운동 이후 좌절감과 무력감 속에서 단판승부로서 조선총독부가 있는 경성의 한복판에서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포위망 탈출, 1:1000의 총격전을 통해
    정면도전을 하여 대한 남아의 기개와 독립정신을 보여 주었다.
  • 〮 김상옥 의사는 하급 군인의 아들, 가난한 소년 노동자, 대장간 일꾼 등 사회의 특권적 지위나 대우를 누리지 못한 계층 출신임에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전 재산과 생명까지 바쳤다.
    이런 보통사람들의 특별한 희생정신, 즉 비()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며 애국심의 근간이다.
    김상옥 의사는 비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의 대표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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