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헌병대 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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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1-09-07 조회 : 2,070본문
1916년 김상옥 의사 27세에
한훈, 유장열, 곽경렬, 유창순, 채기중, 등과 전남 보성군 조성면의 조성헌병대를 기습, 무기를 탈취하고 반민족분자 2명 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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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기념해야 할 광복단의 '조성헌병대 기습의거'
윤 우 (의병정신선양회 회장, 전 광복회 부회장)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경술국치'(1910.8.29)로 부터 6년 후인1916년 5월, 비밀무장 독립투쟁단체인 '광복단'이 전라남도 보성의 일본군 '조성 헌병대'를 기습, 장촐 2정과 권총 1정, 군도 1개를 노획하고 그 지역의 친일 민족 반역자 수명을 처단한 의거가 있었다.
조성은 현재 행정구역상 보성군의 한 면이지만 옛날에는 조양현, 또는 조양원 이었다.
일제가 한국의 전통과 파괴책의 일환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기
이전에는 '현' 또는 '원' 이었던 곳으로 군사상 요지이다.
1. 일제, 군사요충에 '헌병대' 두어 탄압
보성에서 동북방 야 12km, 벌교 서남방 8km 지점에 위치한 조성은 고흥반도 서쪽의 득량만'을 끼고 있는데 그 만의 북단에는 백제 유민들이 일본, 중국과 교역 왕래 할 때 이용한 '조양 포구'가 있었다. 그 포구는 1927년 일제가 '득량만' 간척사업과 보성강 댐 공사를 시작하기 이전에는그 이래의 농수산물과 다른 지방의 물자 등이 드나드는 물류의 중심이기도 했다. 또 일제가 우리 농산물을 수탈해 가는데 이용한 항, 포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가 하면 조성의 동쪽과 서쪽 남해안 일대는 임진와란(1592~98) 때 이순신 장군의 수군을 뒤에서 받쳐준 의병의 활약지대였고 일본의 근세 재침략 때에도 여러 의병부대들이 곳곳에서 치열하게 싸운 격전지였다. 특히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기 직전인 1909년 이른바 '남한 대토벌' 이란 이름의 '대학살'을 자행할 때 그에 맞서 굳세게 저항한 의병 전적지 이다 . 그러한 곳에서 광복단의 무장투쟁이 이어진 것이다. (광복단의 전라부장은 이병찬 선열-북내중학교에 동상이 있다.)
한편 '조성헌병대' 즉 일본군 '순천 헌병대 조성 분견대'가 있던 곳은 조성면 용전리(한밭) 121번지 일원인데 현재는 부지 150여 평 정도의 민가가 들어서 있다. 광복단의 '조성헌병대' 기습의거는 문헌으로만 전해오던 것을 지난 2 002년 9월 처음 필자가 현지답사, 지역 원로와 동네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 헌병대가 있던 현장을 밝힌 것이다.
'조성헌병대' 뒷편에는 참나무가 있었고 거기에 독립투사 등을 매달아 고문하는 소리가 그 일대에 들렸다고 하며 사람들은 그 곳을 '헌병대청' 이라고 일컬어 왔다 한다.
또 '헌병대' 서쪽 300m 지점에는 일본군 보병부대가 주둔해 있었다고 한다.
그 '헌병대' 자리는 '조양 포구' 가 있던 곳에서 서쪽으로 200m 개활지 평원 중심의 구릉으로 방어와 통제와 유리한 지형조건을 갖춘 위치이다.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을 뿐 아니라가장 가까운 산도 1.5km 동쪽에 있어 소화기의 사정권을 벗어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또 다른 '헌병기병대'가 있었던 보성읍 서쪽 6km지점의 현 배상초등학교 자리 (장흥군 장동면 배산리)도 비슷한 지형 조건을 갖춘 곳이다. 그 곳은 1909년 이백리 의병장이 순국한 곳이다. 일제는 그러한 요지에 헌병대를 두어 독립 항쟁에 대처하고 억압 통제했던 것이다.
2 . 의병의 맥 이은 '광복단'
광복단(대한광복단)은 1913년 초 경북 풍기에서 채기중 주도 아래 유창순, 유장열, 한 훈, 강병수, 김상옥 등이 무장 독립투쟁을 목적으로 결성 점차 규모를 확대해 나간 비밀결사이다. 창단 구성원 중 유창순, 한 훈, 강병수 등은 의병 출신이고 나머지 대종교 출신자 또는 서울 태생인 김상옥 의사처럼 타 지역에서 온 열혈청면들 이었다.
광복단은 당면목표인 무장 독립투쟁을 위해서는 독립군을 양성해야 했고 따라서 군자금 확보와 무기구입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80여명의 단원이 친일 악질부호나 일본인 강산주 등을 협박하여 자금을 마련하고 만주 등지에서 권총과 탄환을 도입하면서 전국을 무대로 활약하였고, 그 과정에 한 훈, 김상옥, 유장열, 곽경렬 등이 서남해안 일대에서 '헌병대'를 기습하는 등 의병과 같은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한 훈, 김상옥은 그 후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요로와 협의하고 국내에 잠입해서 김좌진 장군이 밀파한 독립군 요원과 함께 1920년 서울 에 서 일제 총독 주살과 기관파괴를 기획했다가 사전 검속으로 이루지 못했으나 김상옥은 1923년 1월 서울 한 복판에서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후암동과 효제동에서 대규모 시가전을 펼쳐 일제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크게 떨쳤다.
광복단의 그러한 활동은 바로 의병의 맥을 이은 것이다.
1984~5년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의병항쟁은 20여 년간 지속 되었지만 중부 이남지역에서는 1910년 경술국치 이전에 배 부분 쇠진한 상태였다. 그리고 경기북부와 황해, 평남, 강원, 함남 남부 일대에서 활약하던 채응언 의병부대가 1915년 7월 평남성천에서 와해 단함으로서 국내 의병 항쟁은 거의 종식되었다. 그래서 그 후에는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한편 만주와 연해주 의병의 3.1운동(1919) 이후 독립군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런데 1905년 전후의 후기 의병전쟁에서는 호남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특히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하기 전 해인 1909년에는 전라도의 의병 교전회수가 574회로 전국의 31.5%, 교전의병 수는 17,579명으로 전국대비 45.6%나 되었다. 그러한 현상은 다른 지역의 의병이 쇠퇴하거나 호남지역 인사들이 대거 의병에 가담하여 실제로 호남지역 인사들이 대거 의병에 가담하여 최후까지 항쟁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
3. 현충시설 마련하고 높은 뜻 기려야
광복단의 '조성헌병대' 기습의거는 1910년대의 대표적인 국내 무장 항일 투쟁의 하나였다. 일제가 한반도 내의 의병활동을 '남한 대학살'등으로 제압하고 이른바 '합방'을 조작, 강점한 식민지 통치를 본격 추진하던 1916년에 광복단이 대담한 기습작전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남한 대학살' 이후에도 일제가 보복만행을 자행하던 현장에서 탄압의 본산인 헌병대를 쳐부수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의거라 아니할 수 없다.
한편 광복단의 '조성 헌병대' 기습은 일제의 신식 무기 앞에 의병 부대들의 패전이 거듭된데 다가 학살 만행, 무단통치에 극심한 고통을 당하던 그 지역 주민들의 한을 풀기라도 한듯 승리를 거둔 의거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만시지탄이 크지만 이제라도 서둘러 그 뜻있는 의거 현장에 현충시설을 마련하여 기념하고 국가민족을 위해 온 몸을 받쳐 독립투쟁을 펼치신 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려야 한다. 오늘이 있게 만들어 주신 그 분들의 거룩한 희생 정신을 받들고 교훈 삼는 것이야말로 후대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전문가와 현지 원로들의 고증과 논증을 통한 역사 확인이 필요 할 것이다. 한편 현충시설을 마련하고 기념하면 지역 관광 자원의 하나로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출처: 보성문화. 2006.15호)
한훈, 유장열, 곽경렬, 유창순, 채기중, 등과 전남 보성군 조성면의 조성헌병대를 기습, 무기를 탈취하고 반민족분자 2명 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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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기념해야 할 광복단의 '조성헌병대 기습의거'
윤 우 (의병정신선양회 회장, 전 광복회 부회장)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경술국치'(1910.8.29)로 부터 6년 후인1916년 5월, 비밀무장 독립투쟁단체인 '광복단'이 전라남도 보성의 일본군 '조성 헌병대'를 기습, 장촐 2정과 권총 1정, 군도 1개를 노획하고 그 지역의 친일 민족 반역자 수명을 처단한 의거가 있었다.
조성은 현재 행정구역상 보성군의 한 면이지만 옛날에는 조양현, 또는 조양원 이었다.
일제가 한국의 전통과 파괴책의 일환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기
이전에는 '현' 또는 '원' 이었던 곳으로 군사상 요지이다.
1. 일제, 군사요충에 '헌병대' 두어 탄압
보성에서 동북방 야 12km, 벌교 서남방 8km 지점에 위치한 조성은 고흥반도 서쪽의 득량만'을 끼고 있는데 그 만의 북단에는 백제 유민들이 일본, 중국과 교역 왕래 할 때 이용한 '조양 포구'가 있었다. 그 포구는 1927년 일제가 '득량만' 간척사업과 보성강 댐 공사를 시작하기 이전에는그 이래의 농수산물과 다른 지방의 물자 등이 드나드는 물류의 중심이기도 했다. 또 일제가 우리 농산물을 수탈해 가는데 이용한 항, 포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가 하면 조성의 동쪽과 서쪽 남해안 일대는 임진와란(1592~98) 때 이순신 장군의 수군을 뒤에서 받쳐준 의병의 활약지대였고 일본의 근세 재침략 때에도 여러 의병부대들이 곳곳에서 치열하게 싸운 격전지였다. 특히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기 직전인 1909년 이른바 '남한 대토벌' 이란 이름의 '대학살'을 자행할 때 그에 맞서 굳세게 저항한 의병 전적지 이다 . 그러한 곳에서 광복단의 무장투쟁이 이어진 것이다. (광복단의 전라부장은 이병찬 선열-북내중학교에 동상이 있다.)
한편 '조성헌병대' 즉 일본군 '순천 헌병대 조성 분견대'가 있던 곳은 조성면 용전리(한밭) 121번지 일원인데 현재는 부지 150여 평 정도의 민가가 들어서 있다. 광복단의 '조성헌병대' 기습의거는 문헌으로만 전해오던 것을 지난 2 002년 9월 처음 필자가 현지답사, 지역 원로와 동네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 헌병대가 있던 현장을 밝힌 것이다.
'조성헌병대' 뒷편에는 참나무가 있었고 거기에 독립투사 등을 매달아 고문하는 소리가 그 일대에 들렸다고 하며 사람들은 그 곳을 '헌병대청' 이라고 일컬어 왔다 한다.
또 '헌병대' 서쪽 300m 지점에는 일본군 보병부대가 주둔해 있었다고 한다.
그 '헌병대' 자리는 '조양 포구' 가 있던 곳에서 서쪽으로 200m 개활지 평원 중심의 구릉으로 방어와 통제와 유리한 지형조건을 갖춘 위치이다.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을 뿐 아니라가장 가까운 산도 1.5km 동쪽에 있어 소화기의 사정권을 벗어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또 다른 '헌병기병대'가 있었던 보성읍 서쪽 6km지점의 현 배상초등학교 자리 (장흥군 장동면 배산리)도 비슷한 지형 조건을 갖춘 곳이다. 그 곳은 1909년 이백리 의병장이 순국한 곳이다. 일제는 그러한 요지에 헌병대를 두어 독립 항쟁에 대처하고 억압 통제했던 것이다.
2 . 의병의 맥 이은 '광복단'
광복단(대한광복단)은 1913년 초 경북 풍기에서 채기중 주도 아래 유창순, 유장열, 한 훈, 강병수, 김상옥 등이 무장 독립투쟁을 목적으로 결성 점차 규모를 확대해 나간 비밀결사이다. 창단 구성원 중 유창순, 한 훈, 강병수 등은 의병 출신이고 나머지 대종교 출신자 또는 서울 태생인 김상옥 의사처럼 타 지역에서 온 열혈청면들 이었다.
광복단은 당면목표인 무장 독립투쟁을 위해서는 독립군을 양성해야 했고 따라서 군자금 확보와 무기구입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80여명의 단원이 친일 악질부호나 일본인 강산주 등을 협박하여 자금을 마련하고 만주 등지에서 권총과 탄환을 도입하면서 전국을 무대로 활약하였고, 그 과정에 한 훈, 김상옥, 유장열, 곽경렬 등이 서남해안 일대에서 '헌병대'를 기습하는 등 의병과 같은 전술을 구사한 것이다.
한 훈, 김상옥은 그 후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요로와 협의하고 국내에 잠입해서 김좌진 장군이 밀파한 독립군 요원과 함께 1920년 서울 에 서 일제 총독 주살과 기관파괴를 기획했다가 사전 검속으로 이루지 못했으나 김상옥은 1923년 1월 서울 한 복판에서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후암동과 효제동에서 대규모 시가전을 펼쳐 일제의 기만성을 폭로하고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크게 떨쳤다.
광복단의 그러한 활동은 바로 의병의 맥을 이은 것이다.
1984~5년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의병항쟁은 20여 년간 지속 되었지만 중부 이남지역에서는 1910년 경술국치 이전에 배 부분 쇠진한 상태였다. 그리고 경기북부와 황해, 평남, 강원, 함남 남부 일대에서 활약하던 채응언 의병부대가 1915년 7월 평남성천에서 와해 단함으로서 국내 의병 항쟁은 거의 종식되었다. 그래서 그 후에는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한편 만주와 연해주 의병의 3.1운동(1919) 이후 독립군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런데 1905년 전후의 후기 의병전쟁에서는 호남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다. 특히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하기 전 해인 1909년에는 전라도의 의병 교전회수가 574회로 전국의 31.5%, 교전의병 수는 17,579명으로 전국대비 45.6%나 되었다. 그러한 현상은 다른 지역의 의병이 쇠퇴하거나 호남지역 인사들이 대거 의병에 가담하여 실제로 호남지역 인사들이 대거 의병에 가담하여 최후까지 항쟁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
3. 현충시설 마련하고 높은 뜻 기려야
광복단의 '조성헌병대' 기습의거는 1910년대의 대표적인 국내 무장 항일 투쟁의 하나였다. 일제가 한반도 내의 의병활동을 '남한 대학살'등으로 제압하고 이른바 '합방'을 조작, 강점한 식민지 통치를 본격 추진하던 1916년에 광복단이 대담한 기습작전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남한 대학살' 이후에도 일제가 보복만행을 자행하던 현장에서 탄압의 본산인 헌병대를 쳐부수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의거라 아니할 수 없다.
한편 광복단의 '조성 헌병대' 기습은 일제의 신식 무기 앞에 의병 부대들의 패전이 거듭된데 다가 학살 만행, 무단통치에 극심한 고통을 당하던 그 지역 주민들의 한을 풀기라도 한듯 승리를 거둔 의거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만시지탄이 크지만 이제라도 서둘러 그 뜻있는 의거 현장에 현충시설을 마련하여 기념하고 국가민족을 위해 온 몸을 받쳐 독립투쟁을 펼치신 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을 기려야 한다. 오늘이 있게 만들어 주신 그 분들의 거룩한 희생 정신을 받들고 교훈 삼는 것이야말로 후대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전문가와 현지 원로들의 고증과 논증을 통한 역사 확인이 필요 할 것이다. 한편 현충시설을 마련하고 기념하면 지역 관광 자원의 하나로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출처: 보성문화. 2006.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