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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경찰서 폭파 - 독립운동 탄압전담 종로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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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1-09-06 조회 : 1,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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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아일보기사
<종로경찰서에 폭탄투척>    -십이일밤 여덟시 종로서 서편 창에  폭탄을 던지어 큰소리를 내고 폭발-
십이일 밤여덟시 10분에 종로경찰서에 폭발물을 던지었다. 
여덟시십분에 종로경찰서 서편 동일당간판점 모퉁이길에 서있던 사람이 경찰서 서창을 향하여
폭탄 한 개를 던졌는데 쾅쾅하는 소래를 내이며 폭발하였더라.

2.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 통치하면서 애국 인사들을 가장 많이 체포, 고문하던 원한의
복마전이었다.다시 말해서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 전반을 중점 수사하고
 탄압하는 전담 경찰서 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지금의 서울시경과 같은 기구는 없었고
 서울에는 경기도경  산하로 된 4개의 경찰서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종로경찰서
고등계가 바로 악명 높은 독립운동 탄압 '전담기관'이었던 것이다.

 윤우 < 김상옥 의사, 265쪽>


3.  1923년 1월 12일 밤여덟시10분이었다.  그렇지않아도 해가 짧아 이미 깜깜해진
거리에 상점 불빛만 반짝이는 종로 2정목의 경성 종로경찰서 서편 창에서 문에서
 “쾅!”하는 요란한 폭음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와장창 유리창이 깨져 쏟아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고,  곧  사람들의 외침과
아우성 소리가 어지럽게 렸다.  폭탄이 터진 곳은 경찰서 서편 경무계가 있는 사무실이었다.

억눌린 사람들은 주변에 생긴  변화에 예민한 관심을 갖는다. 내리 누르고 있는
 답답한 현실에서  뭔가를    어떤 이변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변화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독립운동 탄압의 본산인 종로경찰서였다.
말은 하지 않더라도 얼마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살이 찢겨지고 피가 터져 고통의
외마디 소리를 질러  왔던 곳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 종로경찰서에서 큰 폭음이 들렸고, 파괴가 일어났다는 것은 틀림없이
비밀 독립운동가의 거사라고 믿을 만 했다.
 ‘뭔가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희망을 갖게 했다. 소문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번개처럼 퍼져 나갔다. 종로네거리 일대와 종로서 부근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종로경찰서 경찰들은 혼비백산하여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잠시 후 상부의 지휘를 받아 폭탄에 맞아 파괴된 현장보존 조치를 하고,
 감식 등 현장 조사를 진행하는 한편, 부근 일대를 지나가는 행인들에 대해 검문검색을 시작했다.
또한 부상자들을  가까운  병원으로  옯겨  응급치료를  받했다.
사람들은 종로 한복판에서 그것도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에다 누가 폭탄을 터뜨렸는지,
아니면 사고인지 하나라도 더 이야기를 얻어 들으려고 웅기중기 모여들어
수군거리며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중간생략

동아일보는 이틀뒤인 1923년 1월 14일에야 이사건을 대문짝 만하게 대서특필했다.
이튿날에도 동아일보는 종로경찰서 투탄사건에 대해,
수사본부는 종로에 -시내 각서와 연락활동. 특별히 별동 수색대까지 조직- 등의
제목과 부제목을 뽑으며 수사 상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이보도를 보면,
비상이 걸린 일본경찰은“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밤낮 계속 활동하는” 상황이며,
“약간만 의심이 있는 자면 즉시 경찰서로 데려다가 엄중히 취조 중인데”
그런 사람이 30명이 넘고 이미 취조하고 방면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1월12일  아침 김상옥은 창신동 집에 연락하여 어머니에게 집에 몰래 감추
어두었던 폭탄 하나를 무내미(수유리)  외가로 가지고 오시도록 부탁했다.
김상옥은 그 시간에 맞추어 무내미 산기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어머니가  부탁한 폭탄을 가지고 오자 받고는 어머니와 헤어졌다.

‘이 폭탄의 성능이 어느 정도 될까 시험해 봐야겠다.’
김상옥은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거사에 사용할 폭탄이 어느 정도 위력을
가지는지 가늠할 길이 없었다. 그 폭발력을 알아야 이를 감안하여 조선총독
부를 뒤집어 놓으려면 어느 정도의 폭탄을 사용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계획
을 세울 수 있었다.
경찰들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제지하기에 안간힘을 썼다.
‘대대적인 범인 수색이 시작될 거다.’
‘이제부터는 정말 위험지대로 들어섰구나. 사선에 섰다.’
김상옥은 경찰이 누구보다 자신을 먼저 주목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혹시 내 얼굴을 아는 순사를 만나면 곤란하다.’
“갑시다. 윤 동지, 얼른  피합시다.”
김상옥은 사람들 속에 있다가 순사나 형사들 눈에 띌 우려가 있기 때문에
윤익중의 옷소매를 이끌고 얼른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거 참. 통쾌합니다. 서울 한복판의 경찰서에다 폭탄을 터뜨리다니요. 
처음 있는 일 아닌가요?    ”윤익중이 말했다.
“글세, 통쾌하긴 하지만, 그다지 큰 성과는 없구먼.”
김상옥은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서도 일본인 경찰 한 명도 처단하지 못했다는 게 아쉬웠다.
종로경찰서는 경찰측 인명 피해는 없는 것으로 피해사실을 축소하여 발표 했다.
상해판 독립신문은 부상자 중에 일본경찰 3명도 포함 되었다고 보도했다.
18 한살임이란 필명으로 조소앙이 지은 「김상옥전」에는 서울시중의 최요해처 서 일어난 일로서,
중경상자가 일본경찰 및 일 본 신문 매일신보 사원  장상용 등 10여 명이라고 되어 있다.

이정은 <김상옥 평전,  374쪽~3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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