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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남산 맨발로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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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1-09-09 조회 : 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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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남산 맨발로 넘어

  삼판통(현, 후암동) 고봉근 매부 집에서 탈출하여 산으로 향한 김상옥은 그 전날 밤 눈이 많이 내려 대설이 쌓인 눈 속을 헤치며 길 없는 남산 마루턱 숲 사이를 지나면서 방향을 잡아나갔다.  아직도 날이 새지 않은 어두움 속에서 때로는 무릎까지 묻히는 눈길을 달아나기란 여간 큰 어려움이 아니었다. 유일한 지침은 훤한 눈빛을 의지 할 뿐인데 여기서 날이 밝게 되면 꼼짝없이 포위될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1. 남산 채석장 절벽에 떨어지기도
 한참 동안 걸어와 보니 송림을 지나 바른편에 낭떠러지가 된 절벽이 나왔다. 그의 생각에는 상당한 거리를 걸어 나온 듯 했다. 이제 얼마가지 않으면 한강리에 당도할 듯 하여 뛰다시피 발을 옮겨 디뎠다. 그런데 실로 앗차 하는 순간 발이 쭉 미끄러져 몸을 가눌 사이도 없이 그대로 낭떨어지 절벽에 떨어지고 말았다 .여기가 당시 유명했던 서빙고 채석장으로 위험하기 이를 데 없었던 곳이다. 아무도 없는 밤길을 헤매다가 층암 절벽 낭떨어지에 떨어진 그가 무사했다면 이는 기적이나 우연으로 표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김상옥이 떨어진 낭떨어지는 채석 바위돌이 아니고 바위가 침대처럼 펀펀하게 가로 놓여진 곳이라 발이 미끄러져 아찔하는 순간 정신을 차려 사뿐 내려앉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곳은 채석장이었기 때문에 부서진 칼날 같은 돌멩이가 눈 속에 묻혀 깔려 있었다. 그래서 버선만 신고 뛰어나온 발바닥이 다 헤어지기 시작하여 발을 옮기기가 몹시 거북해졌다. 김상옥이 자기가 버선발임을 인식한 것도 이 때였다.  겨우 채석장 비탈길을 걸어 장충단 부근의 백호정(활터)에 도달했다. 장충 고개 마루턱에 올라서니 동녘 하늘이 밝아오며 먼동이 환하게 떠올랐다.

장충단 개울 다리에 이르러 두 자루의 권총 생각이 나서 다리 밑 돌담 옆에 쌓인 눈 속에 묻고 왕십리에 있는 안장사에 당도한 것은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김상옥이 남산으로 탈주한 뒤 일경은 남산을 포위하고 그 속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이 날의 동아일보 호외는 [설중의 남산포위] 란 제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즉시 각 경찰서 정복 순사 1천여 명을 풀어 그가 도망한 남산을 나는 새도 빠지지 못하게 에워싸고 눈 쌓인 남산 전부를 수색하고 일변 수백 명 경관은 왕십리 일대와 광희정 일대를 수색하며 기마 순사가 총검을 번쩍이며 삼판통 일대를 경계하니 실로 금시에 경성 시내 일대는 전시 상태와 같았으며 일면 김상옥의 누이와 고봉근과 그 친족까지 전부 경기도 경찰부로 인치하였다.]

 일본경찰 당국은 경기도 경찰부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시내 각 경찰서의 순사 약 1천명을 동원하여 남산일대를 포위하는 동시에 김상옥의 매부 고봉근 내외, 모친 김씨, 아우 김춘원 그리고 부인 정씨 등 친족 전부를 비롯하여 동지 등 연루자를 검거한 후 엄중한 문초를 하였으나 끝내 행방을 찾지 못하였다.

2. 보폭 10m - '축지법‘ 의심
그리하여 경찰은 남산 눈 위의 발자국에 주목하여 그것을 따라 추적했는데 놀라운 것은 발자국과 발자국 사이가  5미터 혹은 10미터의 간격이 벌어져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 점이 후일 “김상옥이 축지법을 썼다”는 얘기가 장안에 퍼지게 된 원인이 된 것으로 이것은 지금도 불가사의한 일로 전해지고 있는데 혹시 나뭇가지를 잡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옮겨간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사람이 위급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힘이 열배 이상으로 솟아나는가 하면 자신도 모르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우리들 주변에도 허다히 있고 보면 김상옥 또한 생과 사의 막다른 길목에서 어떤 절대적인 힘이 솟아났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그의 우국충정을 헤아린 호국 신령들이 김상옥으로 하여금 눈 덮인 남산 허리, 험준한 수림사이를 5미터씩 또는 10미터씩의 발자국만 남기게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간 오늘의 우리들에게 있어서 불가사의하되 놀랄만한 기적으로 오래오래 남아 있게 될 것이다.


3. 승복으로 몸을 가리고, 짚신은 거꾸로 신고

  김상옥은 잠시 동안 휴식을 얻고 자신의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안장사에 들어섰다. 우선 절간 부엌으로 찾아 들어갔다. 몹시 시장기가 들었기 때문이었다.
  동승들이 아침밥을 짓고 있는데 김상옥은 체면 가릴 것 없이 「수고하는군!」하고 아는 체를 했다. 동승아이는 본시 친절함인지 또는 좀 낯익은 기억이 있는지「웬일이십니까?」하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내가 밤새도록 걸었더니 시장해 못 견디겠네」 하고 밥을 청했더니  '아직 밥이 끓는 중인데 이거라도 드릴까요? '하고 끓어오르는 밥솥을 열어 보였다. 김상옥은  '이거라도 먹어야겠군!' 하고 웃으니 동승도 따라 웃으며 바가지에다 생쌀을 그대로 반 바가지쯤 떠 주었다. 김상옥은 너무 뜨거운 것 같아 바가지 채 찬 물에 담가 식힌 다음 후루룩 들이마시고 그대로 우물우물  십어 삼키기를 대여섯 차례하고는 비로소 몸을 살폈다.

  눈 쌓인 산을 맨발로 걸어오느라 발바닥이 헤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공복을 채우고 스님을 찾으니 주지는 김봉암 스님이었는데 그에게 양말 한 켤레와 승복(장삼)과 짚신을 얻어 신고, 송낙(소나무 겨우살이로 엮어 만든 여승의 모자)을 쓰고 새벽 불공을 하러 가는 것처럼 급히 왕십리를 향하여 산길을 내려갔다. 이 때 김상옥은 짚신을 거꾸로 신고 내려 왔으니 이는 자기를 뒤쫓을 경찰이 필경 눈 위의 발자국을 목표 삼을 것이라 생각하고 기지를 발휘했던 것이다.
  한편 장삼을 입고 송낙을 쓰고 안장사를 나온 김상옥은 왕십리 이 노인(김상옥이 대장간에 있을 때 한문을 가르쳐 주던 선생)댁에 들러 버선과 신을 다시 갈아 신고 이 노인과 겸상하여 조반을 들었다. 그리고 급한 볼일이 있다고 이 노인 댁을 나와 마장동 개천을 건너 청량리 쪽으로 가서 영도사 뒷 고개를 넘어 미아리 밖 무내미(수유리)로 총총히 걸어 이모의 집으로 갔다.


4. 수유리 이모댁서 쉬고 다시 시내로 잠입
 도중 김상옥은 그 길로 바로 의정부를 거쳐 강원도로 들어가 금강산 절간에 가서 잠시 휴양하다가 기회가 오면 다시 돌아오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동지들과 큰일을 계획해 놓고 혼자 떠나 버린다는 것이 비겁한 것 같기도 하고 혁명가로서 행할 수 없는 죄악인 듯하여 그는 동지들에게 일단 소식을 전한 후 선후책을 의논한 다음 자기의  방향을 설정하려고 오늘은 이모님 댁으로 피신했다가 땅거미와 함께 문안으로 들어가기로 작정했다.  이모 댁에서는 갑자기 승복 차림을 한 이 불의의 손님에 대해 모두들 깜짝 놀랐다.  '웬 일이냐? 지금 상해에서 나오는 길이냐, 아니면 피신 중이냐' 하고 이모가 물었다.
김상옥은 다행히 여기까지는 아직 삼판통 사건이 전해지지 않은 듯 하여 말대답이 성가시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이제 세상이 귀찮아져서 중이 되었으니 시주나 좀 하시요' 하고 웃었다.  김상옥은 이모님에게 피곤하니 잠시 눕겠노라고 하고 골방으로 들어가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다면서 자리에 누워 버렸다. 김상옥이 잠이 깼을 때는 벌써 오후 네시 반, 겨울 해가 서산마루로 넘어가려 했다.
 그는 이모님에게  재촉해 저녁을 먹고 빠른 걸음으로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 지금쯤 문안에 경계가 삼엄할 것인데 그 경계망을 뚫고 들어가려면 너무 밝아서 얼굴이 뵈어도 안 되겠고 또 너무 늦어도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가 넘어갈 무렵인 땅거미와 함께 동소문 관문을 통과하려고 걸음을 재촉했던 것이다. 미아리 고개 넘어 동소문 고개에 이르니 마침 나무바리를 싣고 가는 마차 한 대가 문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김상옥은 중이 문 밖에 시주를 갔다가 나무바리와 같이 오는 구나 하는 정도로 알게 하려고 나무바리 뒤에 가 딱 붙어서 고개를 넘었다.  성 밑에는 예기한 바와 같이 형사 둘이 서서 오늘 새벽 삼판통에서 형사 셋을 쏘아 넘긴 혐의자를 찾는 모양이었다. 나무바리가 지나가고 중이 지나가고……그것쯤 별 혐의를 둘 것이 없었든지 형사들은 잠입하려는 김상옥을 아무 거리낌 없이 무사 통과 시켰다.

  동소문 고개를 내려와 종로 5가로 통하는 대로를 걸었다. 연지동 못이 있고 방아다리 채소밭 사이에 단 네 가구의 집이 있는 효제동의 한 집으로 들어가니 이곳이 효제동 73번지 이태성(이혜수 동지의 부친)씨 댁이다.

(출처:일제하 서울시가정 승리90주년기념 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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