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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치료하며 거사 협의 중 소재 노출 (그간의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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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1-09-10 조회 : 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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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상 치료하며 거사 협의 중 소재 노출 (그간의 경과)

1월 17일
  이 집(효제동 73번지 이태성-이혜수의 부친)은 김상옥의 생가(효제동 72번지)와 붙은 집이어서 전에도 연락 장소로 이용하기도 했고 또 밤이 늦으면 건너 방에서 자고 가기도 했기 때문에 일가친척의 집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집이다. 동지 이혜수 역시 김상옥과는 허물없이 지내는 터고 또 존경하는 동지이기 때문에 그가 여성 동지 운동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즉 김상옥 등이 「혁신공보」를 발간할 때부터 자매단체원으로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이혜수는 신문배달, 정보연락 등의 중책을 다했고 김상옥이 상해로 간 뒤에는 애국부인 단원들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푼푼이 모아 김상옥을 통해서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김상옥은 이날 밤 이혜수의 집 건너 방에서 푸근히 잤다. 이혜수는 장작개비를 때어서 방을 따듯하게 해 주었다.


1월 18일

  아침 김상옥은 이혜수에게 두 가지를 부탁했다. 
  1) 하나는 장충단 공원 돌다리 밑에 묻어둔 권총 두 자루를 찾아다 달라는 것이고
  2) 또 하나는 발이 얼어서 몹시 아프니 병원에 가서 약을 얻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제야 김상옥은 삼판통 사건을 대략 얘기 했다. 이혜수는 이야기를 들으며 여러 번 놀랐다. 이혜수는 우선 대학병원에 간호부로 있는 친구 고모라는 여자에게 부탁했다. 그 간호부는 병원에 있는 좋은 약을 갖고 와서 지성껏 간호해 주었다.  오후 2시경 이혜수는 장충단 공원으로 들어가 김상옥이 일러준 돌다리를 찾았다. 하얗게 쌓인 눈 위에는 아직도 사람이 다닌 흔적은 많지 않고 호젓하기만 했다. 그는 전후좌우를 살펴보고 금세 총 두 자루를 찾아서 두루마기 주머니 안에 감추어 갖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혜수는 김상옥이 있는 방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어휴! 무서웠어요.’ 하고 어려운 사명을 완수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김상옥은 ‘혹시 없어지지 않았나 하고 여간 걱정하지 않았는데 덕분에 내 생명 같은 총을 찾았구려.’ 하며 무척 기쁜 표정을 지었다.

  12연발 싸-창(모젤 1호)과 8연발 골드식 2자루였다. 김상옥은 그의 말과도 같이 정말 총을 생명처럼 아꼈고 그 중에서도 작년 5월 장규동의 관을 살 돈으로 산 싸-창 12연발은 더욱 아꼈다.

 그날 밤 김상옥은 이혜수의 아우를 시켜서 전우진을 불러 왔다. 그리고 전우진에게 전번 상해에서 돌아 왔을 때 맡긴 탄환 궤짝을 가져오도록 하고 내일 아침에는 정설교에게 아침 일찍 와 달라고 전하게 했다. 


1월 19일

  아침 9시경 정설교가 왔다. 정설교는 그렇지 않아도 삼판통 사건의 풍문을 듣고 김상옥의 소식이 궁금하던 참이라 조반을 급하게 먹고 온 것이다.  김상옥은 정설교를 맞아 삼판통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고 사태의 진전이 어떻게 되었는지 한강리로 나가 한강리 소학교 교사 이창규(이혜수의 동생)를 찾아 정세를 알아보도록 부탁했다. 삼판통에서 넘어온 범인의 발자취가 이 동리에서 끊어졌다 해서 온 동리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설교가 이창규를 만나 김상옥의 말을 전하고 돌아오니 김상옥은 전우진이 가져온 궤짝을 열고 그 속에 든 탄환을 검사하며 일조 유사시에 쓸 준비를 하고 있었다.


1월 20일

  이튿날 한강리 학교 이창규가 효제동 집에 와서 김상옥에게 ‘왜놈들의 경계망이  차츰 이동되어 왕십리 청량리 방면으로 뻗혀 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김상옥은 이 보고를 듣고 경계망이 자기 주위로 뻗어오고 있음을 거의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과연 이날 오후 3시경 동대문서의 김창호 형사가 또 다른 형사 1명과 함께 이혜수 집에 조사차 나왔다. 때마침 이혜수는 대청마루에서 사과를 깍고 있었고 건너 방에서는 김상옥이 총 소제를 하고  있었다. 대문간에서 주인을 찾는 법도 없이 ‘이 집에 김상옥이 오지 않았어요?’ 하며 쑥 들어오는 형사들을 보고 이혜수는 내심 무척 당황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하고, 김상옥에게 주려고 쟁반 위에 깎아놓은 사과를 두 형사에게 내놓으면서 안으로 들어가 해태 담배를 꺼내다 권했다.  ‘김상옥이 어째서 우리 집에 옵니까? 상해로 망명한 후에는 전혀 소식을 모르는데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하고 가볍게 역습하자  형사들은 차분하고 교양 있는 이혜수의 친절이 은근히 고마웠던지 ‘아니오, 그저 좀 조사할 일이 있어서’ 라고 어물거리다 사과를 먹고 담배를 피우면서 다른 이야기만 하다가 그대로 나가 버렸다.  형사들이 간 후 이혜수는 김상옥 방으로 들어와 ‘어휴 김선생 때문에 내 간이 다 녹아요. 호호’하면서 웃었다.
 

1월 21일

  정오쯤 동대문서 형사 한 무리가 인의동 16번지를 덮쳐 전우진을 체포해 갔다.  전우진은 「혁신공보」 발간 때부터 김상옥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정성을 다 바친 동지이다.  고지식한 면이 있지만 김상옥에 대한 충성심과 성실성은 범상치 않았었다.  동대문서 취조실에서 여러 형사들이 둘러싸고 ‘너 김상옥이 있는 곳을 알지?’하고 그가 있는 곳을 대라고 호령호령했으나 전우진은 강경히 부인했다. 사람이 순직해 보여서인지 동대문서에서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상부 지시에 따라 본정서(지금 중부서)로 전우진을 넘겼다. 
 
  본정서에서도 전우진은 동대문서에서와 같이 부인해서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밤이 되어 다시 종로서로 넘어갔다. 종로서에는 그 악명 높은 고등계 미와, 요시노와 조선인 형사 김모 등이 있는데 이들이 직접 전우진을 취조했다. 밤 8시부터 심문하기 시작해서 열두시까지 갖은 악행을 다했다. 매와 고문과 회유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이 다 동원된 이 악랄함 속에 전우진은 견딜 수 가 없었던 것이다.

  그 경위를 동아일보 호외 기사에서는
  ‘(전략) 김상옥의 수하로 일하던 전우진 외 몇 명을 잡아서 엄중히 심문하니 전우진은 김상옥을 효제동 이태성의 집에 소개한 사람이라’ 하기에 이르렀다고 했고 또 「기려수필」에도 동아일보와 같은 내용의 기록이 보인다. 한편 김상옥은 전우진이 갑자기 이렇게 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이날 밤 동지 정설교 등 몇 사람을 이혜수의 집에 모아 앞으로의 일을 의논했다. 정설교 등 동지들은 김상옥에게 상해로 피신하기를 바랐으나, 그는 기왕 입국한 이상 목숨을 걸고서라도 중대 계획을 실천에 옮길 것을 주장하여 신변에 위험이 닥쳤어도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바로 이 때 전우진은 고문에 견디다 못해 김상옥의 은신처를 밝히게 된 것이다.  당시 효제동 이혜수의 댁은, 김동성씨의 술회에 의하면 ‘채전에 5~6호 새로 건축한 집으로 채소밭 가운데 섬과 같이 따로 섰다’는 고립된 곳이었다.  정설교는 이혜수로부터 어제 오후 동대문서 형사들의 조사 나온 이야기를 듣고 제반 사정에 비추어 오늘 밤 당장 김상옥의 거처라도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왜놈들이 왕십리, 청량리에서 단서를 못 잡으면 필연코 문안 수색을 할 터인데 그렇게 되기 전에 옮기자는 것이 정설교의 주장이었다. “나도 그럴 생각이오만 발도 이만치 나았으니 내일 날이 밝으면 강원도 쪽으로 떠나 당분간 서울을 뜰 작정이오.” “김동지의 생각이 그렇다면 지금 당장 옮깁시다.”  “그러나 너무 조급히 굴 것은 없을 것이요, 제까짓 놈들 몇 놈쯤이야 예비수색을 하러온다 하더라도 문제가 없소. 그리고 바깥 날씨가 이렇게 진눈깨비가 오는데 나가려야 나갈 수 있소 ?” 사실 밖에는 진눈깨비가 굉장히 내리고 안개조차 끼어 지척을 가릴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정설교 역시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자정이 가까와 김상옥의 방을 나왔다.
“내일 떠나면 앞으로 한 이주일 동안 못 만나겠소.” 이것이 김상옥과 정설교의 마지막 고별인사가 되었다.

(출처:일제하 서울 시가전 승리 90주년기념 학술대회)



2. 효제동 이혜수 동지 집

  연동교회 교인인 이태성씨 집에는 이혜수 외에도 딸이 넷이 더있었다.  아들 없이 딸만 다섯인집이었다.  이태성의 딸들의 이름은 자료에 따라 달리 나온다. 둘째딸은 한강보통학교 교
였는데 이창규 또는 이순노로 26세이며, 셋째 딸은 이보전 또는 이용은으로 충남 광천학교 교사였고, 넷째 딸 이혜옥은 한성은행 사무원, 막내딸 이요한은 진명여학교 고등과 학생이었다.

  딸아이들은 학교에 보내지않던 당시에 이태성은 딸 다섯을 모두 신식고등교육을 시켰는데, 그 중 위의 넷은 한성고등여학교(경성제일여자고등보통학교, 경기여자고등학교의전신)를 졸업시켰다. 아버지 이태성이연동교회를다녀당시로서는 일찍 개화한 가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혜수 동지 집은 친형제간 집 같아.’
이웃옆집, 연동교회, 독립운동의 동지 등의 인연이 겹쳐 김상옥의 발걸음은 이혜수 동지의 집으로 향하고 있다.  앞뒷집 사이였던 이혜수의집과는서로 숟가락 몇개 있는지도 아는 허물없는 이웃이었다.  서로 어른들 끼리도 잘 알고 형제간 끼리도  잘 알고, 또 딸들이 많아 비밀 연락을 부탁하기 좋았다.  그래서 이혜수네 집은 김상옥으로서는 언제든지 부담없이 활용할 수 있는장소의 하나였다.  김상옥은 1922년 12월 1일 서울에 온 이래 1923년 1월 10일까지 한 달 10일 정도를 서울에서 은신하는 동안12월7일부터는 삼판통의 매부 고봉근의 집에 주로 머물긴 했지만, 이혜수 집을 연락 장소로 이용했으며, 밤이 늦어갈 곳이 마땅치 않을 때는이 집 건넌방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그것은 이혜수의판결문에서 나타난다.
대정 11년(1922) 12월 초순부터 대정 12년(1923) 1월 10일경까지 사이에 수회에 걸쳐 김상옥을 경성부 효제동 73번지 피고의 집에 숙박케하고 이혜수는 어려서부터  김상옥을잘아는사이고,자신이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여성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김상옥은 혁신단을 하면서 이혜수가 참여하는 애국부인회를 자매단체로 삼았다. 이혜수는 김상옥을 옆집 오라버니이자 독립운동에 뜻을 같이하는 선배 동지로서 많이 따랐다. 그런 까닭에 김상옥이 「혁신공보」를 발간할 때는 두 팔 걷어 붙이고 김상옥을 도왔다. 이혜수는 혁신공보의 배포,  정보수집,  동지들 간의 연락 등의 중요한 책임을 맡아 했고,  김상옥이 상해로 간뒤에는 애국부인회회원들이 푼푼이 모은 독립운동 자금을 김상옥을 통해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상옥이 왔니?”
이태성씨는 김상옥을 아들처럼 생각했다.
“아야, 혜수야! 상옥이 쉴방 군불 뜨끈뜨끈하게 때서 뜨시게 쉬게 해주어라.”
“오라버니, 여기 건넌방에서 쉬셔요.”
이혜수는 건넌방을 치우고 김상옥이 쉴 수 있도록 자리를 깔고, 장작개비로 군불을 때서 방을 뜨끈뜨끈하게 해 주었다.
(출처: 이정은/ 김상옥평전 / 405쪽~407쪽)


3. 이혜수(1891.10.02.~1961.02.07.)

  그는 1919년 김마리아·신의경등과 함께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결,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헌납하는 한편 애국지사 들의 비밀연락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김상옥이 윤익중등과 혁신단을 조직하고 〈혁신공보〉를 발행하여 친일매국노를 처단하기 위한 암살단을 조직하자, 주요 회의장소를 제공하고 숙소 및 의류·자금 등을 공급하며 적극 협조하였다.

  또한 1922년 12월, 김상옥이 상해로부터 무기 등을 반입하자 김상옥을 자신의 집에 피신시키고, 비밀연락과 제반 편의를 제공하였다. 1923년 1월에는 윤익중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 100원을 받아 김상옥에게 전해 주었으며, 같은 해 1월 12일 김상옥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18일 효제동 자택으로 찾아오자 김상옥을 나흘 동안 은닉시켰다. 이어 22일 새벽 일경 수백명이 효제동 일대와 그의 집을 겹겹이 포취를 하고 집안으로 진입하자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들고 3시간 동안 일경과 격전을 벌인 끝에 마지막 총탄으로 자결하였다.

  그는 김상옥의 거사로 인해 온 가족과 함께 일경에게 끌려가 잔혹한 고문을 받았으며, 1923년 12월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국가보훈처 공훈록)


  -  이혜수 판결문 -

  조선총독부 경성지방법원의 이혜수 판결문으로, 그를 징역 1년에 처하고 압수한 물건은 환부한다는 내용이다. 이혜수는 여러 명과 함께 공모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독립운동 선전문을 배포하기 위해 상해에서 돌아와 김상옥을 1922년 12월 초순부터 1923년 1월 10일경까지 집에 숙박시켰다.

  특히 김상옥이 종로경찰서를 습격하여 순사 1명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다른 경관을 부상시킨 것을 알면서도 보호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김상옥 의거와 독립운동에 동조하였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은 것이다.
(출처:여성독립운동가 이혜수)


4. 이혜수 동지의 독립운동

1)  애국부인회 결성으로 항일전선에 뛰어들다.

  1923년 1월 22일 새벽, 서울 효제동 한 모퉁이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일본경찰에  포위당한 채 마지막까지 쌍권총을 쏘며 저항하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10여 일전 적의 심장부나 마찬가지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세상을 놀라게 한 의열단원 김상옥이었다.  일본경찰의 물 샐 틈 없는 철통같은 감시망을 피해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던 곳은 효제동 73번지였다.  이곳은 남몰래 의거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동지 이혜수의 집이었다.  김상옥을 숨겨준 이혜수는 누구이며,
 그녀는 생사가 걸린 긴박한 순간에도 자신의 안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왜 김상옥의 피신을 도왔을까  이혜수는 1891년 1월 3일 서울에서 부친 이태성과 모친 고소우리 사이에서  5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자녀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자녀 모두가 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근대교육을 받았다.  한성고등여학교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혜수는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5월에 신의경 등과 함께 애국부인회를 결성하였다.
애국부인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고자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임시정부 요인과 국내에서 활동 중인 애국지사의 비밀연락을 담당했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과 책무로써 항일전선에 온몸을 던질 수 있었던 요인도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2)  혁신단 단원으로서 항일투쟁의 뜻을 함께 하다.

  이혜수가 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할 당시 김상옥은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1890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상옥은 대장간과 영덕철물점 등을 운영하여 생계를 꾸려나갔으며, 동대문교회를 다니면서 많은 청년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였다.보성고등보통학교 윤익중·정설교, 불교학원 신화수 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국에 대해 토론하며 항일투쟁의 뜻을 함께 하는 동지였다.그들은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비밀결사단체인 혁신단을 조직하는 등 자신의 웅대한 포부를 실행하기 시작했다. 안락한 삶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운명과 같이 하려는 험난한 길을 선택하고 나섰다.

  역시 교회를 통해 김상옥을 알게 된 이혜수는 시국토론에 참여하여 의견을 나누었다.특히 혁신단 결성에 즈음하여 단원으로 동참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에 나섰다.
또한 [혁신공보]라는 지하신문 발간을 위한 재정적인 후원은 물론 배포에도 힘을 쏟았다.여성이라는 신분을 활용한 지하신문 배포는 3·1운동 열기를 확산하는 기폭제였다.나아가 국내외에서 전개되고 있던 항일운동을 알려 민족정신을 북돋웠다.


3) 독립운동과 암살단 조력에 온 힘을 다하다.

  한편 1920년 1월 초 북로군정서에서 온 김동순은 만주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에 호응하여  국내에서 식민통치기관 파괴와 총독·고관·친일파 암살을 요청하였다. 이에 김상옥·윤익중 등 혁신단 동지는 암살단을 결성했다. 암살단 결성을 논의한 장소는 이혜수의 집이었다.
이혜수는 이곳에서 신화수가 작성한 암살단 취지문을 동생들과 함께 비밀리에 등사판으로 수백 장을 제작하였다. 또한 암살단의 회의장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암살단원의 식사와 옷가지 등을 준비하며 활동을 지원하였다.

  암살단은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의 한국 방문에 맞춰 의열투쟁을 전개하여 국제적인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계획이 노출되어 김동순 등이 체포되고 김상옥은 일경의 추적을 피해 몸을 숨겨야 했다. 이혜수는 김상옥의 피신을 지원하며 그를 대신하여 비밀연락을 맡았다.  동지인 장규동이 김상옥 망명 후 일제경찰에 연행되어 모진 고문으로 사경을 헤맬 때도 병간호를 맡았다.

  이혜수 등의 도움으로 상하이로 망명한 김상옥은 독립운동자금을 위한 군자금을 모으고자 두 차례나 귀국하였다. 이때 뒷바라지를 담당한 사람도 이혜수였다. 김상옥은 상하이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2년 11월말 조선총독 암살과 종로경찰서 폭파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혜수 집을 거점으로 흩어진 암살단 동지를 규합하고 거사준비에 나섰다.


4)  종로경찰서 투탄의거 혐의로 모진 고문을 견디다.

  1923년 1월 12일 밤 8시, 종로경찰서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폭발음이 일어났다. 일제 경찰력의 중심부이자 독립운동가 탄압의 상징인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투척되었다는 사실은 일제 당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의거 후 용산 삼판통에 있는 매부 고봉근의 집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김상옥은
1월 17일 새벽, 일경 15명의 습격을 받았다. 총격전 끝에 3명의 사상자를 내고 일경의 포위망을 탈출하여 피신한 김상옥의 마지막 은신처는 이혜수의 집이었다. 이혜수의 가족은 그에게 심리적인 안정을 주고 동지들과 연락을 주선하는 등 마지막‘서울 시가전’을 응원하였다. 이혜수와 동생 이창규는 김상옥의 부탁을 받아
 그가 장충단공원의 돌다리 밑에 숨겨놓은 권총 두 자루를 대신 찾아왔다. 은신은 사흘 만에 끝이 났다. 김상옥의 거처를 탐지한 경기도 경찰부장의 총지휘아래 시내 4개 경찰서에서 차출한 무장경찰이 1월 22일 새벽 이혜수의 집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였다. 마지막 격전장이 될 것을 예감한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들고 일경과 접전을 벌였다. 3시간여의 치열한 전투 끝에 탄환이 떨어진 김상옥은 마지막 탄환으로 자결·순국하였다.

  일경과 교전중인 사이 이혜수와 가족 모두는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일경은 종로경찰서 투탄의거의 전모를 밝히고자 잔혹한 취조와 고문을 계속하였다. 나머지 가족이 석방된 후 이혜수는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보내졌다. 1923년 12월 25일 열린 공판에서 그녀는 일경의 고문으로 늑막염에 걸려 거동하지 못한 채 병상에 누워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이혜수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독립운동가들에게 주요 회의장소를 제공함은 물론 독립운동 자금뿐만 아니라 숙소·의류 등을 공급하고 비밀연락을 전달하는 일도 맡았다. 이러한 든든한 지원이 있었기에 의열투쟁 또한 전개될 수 있었다.

(출처:월간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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