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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들의 슬픔과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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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1-09-13 조회 : 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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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김상옥의 유해는 22일 오후 석양이 서쪽 하늘에 비낄 무렵에야 그날 아침까지 일경에게 구류되어 있던 노모와 29세의 젊은 부인 정씨 등의 가족에게 인계 됐다. ????


동아일보는 김상옥의사의가족을 방문하고불의의 초상을당한 집안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김상옥의 시체는 죽은 날 석양에 유족에게 주어 장사하게 되니 그의 집에는 며칠 전까지 경찰서에 잡히었던 육십 여세의 늙은 어머니와 삼십 미만의 처가 시체를 받아가게 되었다.  불의에 생초상을 당한 그 집 문간에는보기만하여도 가슴이 선뜻한 초롱이 달려 있고, 문전에 붙인 주인 잃은 사기 문패도 슬픔을 띄운듯 매운 추위가 살을 에이는겨울날이나 삼복더위가 살을 찌는 듯한 여름날에 김상옥이가 한결 같이 쇠마치를 두드리 던 대장간도 어수선한 열물이 여기저기 흐트러져서 주인없는 집과 쓸쓸한 회포를 말하는 듯하였다.  대문 안에는 김상옥과 평소에 친하던 사람이 와서 앉아서 장사 지낼 걱정을 하고 있으며 안에를 들어가니 한창 김상옥을 놓친 후 경찰의 검거가 혹독할 때에는 그 집에 얼씬도 못하던 친족들도 김상옥이가죽었다는 말을  듣고야 이제는 설마 어떠랴 하고 하나 둘 모이어 얼굴에 수심 띄운 부인네들이 부엌에서 불도 때고 쌀도 씻어 온 집안에 슬픈 기운이 어리고 소병풍을 두른시체방에는 곡성이 처량히 들린다.

이어서 동아일보는아들의 시신을 앞에 두고 오열하는 어머니 김점순의 한 맺힌 목소리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생죽음한 시체를 앞에 놓은 칠십 노모는 반은 미치고 반은 성하여 목이 매인 소리로 "세상에 이런 일도있습니까?"  하도 놀래고 하도 무서워서 어디서 새 한 마리만 날아가도 가슴이 내려앉더니....그러더니......고말하고는 복 받치는 설움과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여 소리를 내어 한참 울다가 “그 애는 자랄 때부터 고생을 하였지요. 옷 한 가지를 변변한 것 못얻어 입고, 밥 한 술을 잘 못얻어 먹으며, 메밀  나까미와 엿밥으로 살았지요. 어려서 공부가 하고 싶어서 “어머니 나를 3년 만 공부시켜주오” 하던 것을  구복이  원수라 그 원을  못 풀어 주었습니다 그려. 그래서 낮에는 대장간에 가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을 다니는데 시간이 급하여 방에도 못들어 앉고 마루에서 주는 것을 서서 퍼먹고 갈때 그저 체할라 체할라 하던 것이 어제 같은데, 어찌하다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하고  한참을  울다가  다시“그래서 공부를 못하였으나 중간에 예수교에 들어서 저의 아버지한테 천주학 한다고 매도 많이 맞고 글을 배울 틈이 없어서 낮에 일하고 밤에 고단 한데도 책을 보다가 피곤함을 못이기어 얼굴에다 책을 덮고 자는 일이 많았지요, 그렇게 어렵건마는 제손으로 푼푼이 돈을 모아 동대문 안에도 집을 둘을 짓고 저 장가들 고제 아우 장가 들이고 기를 쓰고 모아서 이 집 짓고 그럭저럭 앞엣 돈이 삼사만원 밀렸었지요, 그렇더니 몇 해 전 독립운동이 일어난 후에 는고만 가끔 .......집안에도 뭉텅이 뭉텅이 무엇을 백여 놓고 밤중에도 그저 자전거를 타고 돌리고 아침에도 돌리고 두 달 동안이나 그러더니 일경에 잡히어 경찰서에 가서 몇 달 동안이나 고초를 겪고 나온 후 달포를 일어나지도 못하고 드러누워 있는데, 너무 아파서 엎드려 있으면서도 이불속에다 그런 문서를 놓고있습디다.  나는 데인 가슴이 되어 놀래이고 이애 어쩌려고 또 그러느냐, 어쩌려고 그러느냐 하면 어머니 걱정 마십  시오.” 하였지요. 

그러다가 그 이듬해 미국 의원단이 들어올 때에도 또 그 일을 꾸미길래  내가 저사의한하고 말리었지요. 그러더니 마침내 잡히게 되니까 이층에서 뛰어내려 도주하였지요. 그 후에도 집안 사람만 잡혀가 무수한 고초를 겪고나니 어미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어디 가다 잡히지나 않았나 잡혀서 매나 몹시 맞지나 아니하였나 그렇게 쫓기어 다니니 먹긴들 어찌 먹으며 입긴들 어찌 입으랴 어디서 죽지 아니하였나 하고 애를  태이더니 그 후 상해가 있다는 편지를 보고야 즈윽이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 후로는 달만 밝아도 제생각이요, 비만와도 제 생각이요, 추워도 제 생각더워도 제 생각 한시반시를 보고 싶지 않을때가 없었지요. 그 후 몇번을 집에 왔다 갔는데, 이렇게 앉았다가 문소리가 덜컥 나면 내가 나가보면 별안간 그 애가 와서 딱 어떤 때에는 오랫동안 보고 싶던 생각은 어디로 가고 벌컥 겁부터 나서
“이 애야 왜 돌아왔니, 무엇하려고”하면,  그애는“어머니 아무걱 정마십시오, 어머니는 그저 진지나 잡숫고 편히계십시오, 아무 염려없습니다. 나는 죽어도 관계치 않고 살아도 관계치 않은 사람이요." 합디다. 이럴 때마다 “네가 죽어서 어쩌니 살아야지” 하였더니.....그런때에는 보고 싶은 마음에 방에라도 좀들러 앉게 할 마음이 야한이 있겠습니까 마는 잡힐까 보아 무서워서 그대로 돌려보냈습니다. 이럴때에 어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독립운동이 일어난 후 밤낮 거기만 상성을 쏟기 때문에 그  삼사년  동안 어미속을  퍽도 썩이고 애도 퍽도 태이더니 고만 어미 가슴에 죽어도 썩지 못할 불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도 어떤 날 밤에 문이 덜컹 하기에 나가 보니까 와서 섰습니다. “에그 무엇하러 또 왔니, 죽으려고 또 왔니” 하니까 “어머니 이번에는 나 마지막 보는 줄 아시오, 내가 아주 단판 씨름하러왔소." 하기에  “글세 왜 그러니 지복거리도 하고 살어라.” 하였지요. 그러니까 다른 때는 그러지  않더니만 이번에는 제  아내를 찾으며  “그애 어미 어디 있어요?”  하길래 불러 주었더니 잠간 보고  나서 내가 어서 가라고 하였더니 제 누이 집을 알려 달라기에  “왜 누이까지 못살게 하려고 그러느냐?” 하였더니 아니, 잠간 보고 가겠다.”기에  데리고 가서 일러 주었더니 그만 이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려, 이왕  이렇게 죽을 줄알았더면 뜨뜻한 방으로 불러들이어 무엇을 좀 먹이기도 하고 여섯살 먹은 딸자식을 아비 얼굴이나 보여 줄것을 그저 잡힐 까 무서워서 그 추운데 떨고 온 것을 국 한 그릇을 못먹이고 여섯살 먹은 딸이 두 살 때아비를  이별하여 제아비 얼굴도 모르는데 얼굴 한 번 못보여주고....고만 이렇게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내가 목숨이 모질지요. 이것을 당하고도 살아 있으니, ....” 하다가 다시 기자에게 “제 누이의 매부와 동생이 경찰서에 들어가 있으니 어떻게 말씀해서 또
다시 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오래 그리고 못 보든 동생들이 관머리로 붙들고 울게하여 주시오, 그리못하면 그애들에게도 일평생 유한이 되겠습니다.”
하며 더욱 눈물이 웃깃을 적시었다.

아들을 그렇게 앞서 보낸 어머니의 가슴은 그처럼 원통했고, 걸리는 일이 많았으며, 그래서 더욱 슬픔으로 무너져 내렸다.  김상옥의 장례는 5일장으로 결정되었다.

1923년 1월 26일 아침 김상옥의 유해를 실은 상여가 동대문 밖 회기동의 떡전거리3로 가서 북편으로 꺾여 꾸불꾸불한 길을  통해 이문동 뒷산으로 향했다. 조객도 별로 없는 장례 행렬은 쓸쓸하기만  했다. 김상옥의 유해는 지금의 이문동  뒷산의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그러나 뒷날 가족들의 전언에 의하면, 이날 저녁 무렵 일경의 눈을 피해 학생 여러 명이 그 곳까지 찾아와 호곡하며 김상옥의 영혼을 위로했다고 한다.
이정은< 김상옥의사 평전 441쪽~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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