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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옥의사 최후의 모습 - 동아일보 호외 (1923. 3. 15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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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1-09-13 조회 : 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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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한 달 20일 동안이나 보도를 통제 하다 세간의 관심이 시들 해질 즈음이 되어서야 사건의 전모를 보도 할 수있게 허가 했다.  그 만큼 김상옥의사로 인하여 혼비백산 하였고, 이 사건이 민심에 미칠파장을  두려워했다.  동아일보사는 사건보도 통제가 해제되자 3월 15일 양면에 걸처 전면 호외를  발행했다.
이정은  < 김상옥 평전,  434쪽  >

김상옥의 최후 모습 - 동아일보 호외(1923. 3. 15) 기사

  숨이 진 후에도 육혈포에 건 손가락을 쥐고 펴지 아니하고 숨이 넘어 가면서도 손가락으로 쏘는 시늉을 하였다는데  김상옥은  원래  날쌔어 모 청년회의 운동 부장을 한 일도 있었더라 고 기록하고 있다. 
    김을한씨의 술회에도 둘째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하고 있었던 모습을 말하고 ' 그의 뛰어난 용기에는 일경들도 탄복함을 마지 않았었다'.  고 부기하고 있는 것이다.
  김상옥이 효제동에서 일경과의 접전 끝에 장열한 최후를 마쳤을 때는 아직 정오가 안된 아침 나절이었다. 
 원로 언론인 유광열씨는 그 때를 회고하기를 
 "그 때 동아일보 기자들이 달려갔으나 일본경찰이 접근을 못하게 하였다."
"  우리들이 갔을 때에는 김상옥의 유해를 경찰대가 운반하여 거적을 덮어 놓은 후의 일이다."

  나는 취재하기 위하여 장례를 준비하는 김상옥의 집에도 여러번 갔었다.  그의  70 노모는  “그 추운데 왔는데 따뜻한 국물 한 모금도 못 먹이었는데 이렇게 몹시 죽었구나. ”  하고 통곡하였다.  피투성이가 된 유해를 친족들이 모여 염습하는데 몸에는 열 한발의 총상을 입었고 특히 다리 아래로 많이 맞았다.  일본경찰은 주로 다리 편을 쏘아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고 사로잡아서 뒤를 캐어 보려 함인 듯 하였다. 라고  술회했는데 일경은 김상옥이 자결한 뒤에도 변소 벽을 기대고 서 있는 김상옥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던 것이다.

  당시 일경은 언론인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접근마저 막았으나 어떻게 소식을 듣고 왔는지 일군의 학생들이 모여들어 조사를 읽고 애도 하였다고 한다.  이 때만은 일경도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한편 효제동 의거 직후 일제 경무국은 이 사건의 신문 보도를 금지시켰는데 두 달 후인 그 해 3월 15일에 와서야 이를 해제시켜 동아일보는 사건의 전모를 호외로 크게 다음과 같이 보도 했다.

  지난 일월 십칠일 새벽에 경성시내 삼판통 삼백사번지 고봉근의 집에서 경찰의 포위를 당하고 육혈포로서 대항하여 종로서의 전촌형사를 총살하고 기타 매전, 금뢰 양 경부를 중상케 하고 도주한 사건이래 그 달 22일 새벽에 시내 효제동 72번지에 잠복하여 있던 범인을 수백의 경찰이 에워싸고 잡으려 하다가 마침내 범인을 총살한 사건에 대하여는 사건 발생 당시부터 당국의 게재 금지 명령이 엄혹하여 이때까지 자세한 진상을 보도할 자유가 없었더니, 금 15일 오전에 총독부 경무국에서 그 사건에 대한 게재 금지를 해제하였기로 본사에서 신속히 보도하기 위하여 즉시 호외로 발행하는 바이라(십오일정오)라고 보도 경위를 밝히고 김상옥의 출생, 생애 그리고 삼판통에서 효제동 총격전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보도하고 있으나 일제 당국은 김상옥의 자결에 의한 순국을 경찰이 총살시킨 것으로 발표하고 있다.

    당시의 일을 김동성씨는 아침에 신문사에서 전화가 있어 나는 인력거를 타고 연지동 경신학교 구내에 달려가니 형사대 4~50명은 엽총과 몽둥이를 든 무장한 그대로 상부의 명령을 기다리고 둘러섰다.  그 가운데 김상옥의 시체는 거적에 덮였었다. 고 후일(1962년 4월 9일자 동아일보) 술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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