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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 추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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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1-09-24 조회 : 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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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28년12월27일에 병석에 누운
동지 이시영은 차남 규홍으로 하여금 한 자루 향을 가지고 경건히 두어 마디 말씀을 고 김상옥열사 영전에 고합니다.
열사는 하늘이 보내신 측량할 수없이 뛰어난 무용이라 동서고금에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하시고 둘도없이 독특하고 훌륭한 성품의 한분이심으로 비호장군으로 불리우시며 사형선고를 받으신 후에도 철통같은 적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바람처럼 상해에 건너오시와 명덕리가옥에 수년간 동거하시면서 악하고 더러운 사회(의 군자인체하는 사람들을 숙청코저 하셨으나 몇몇 동지의 임시변통으로 만류하니 큰뜻을 이루지 못하매 위태(급숭)로운 정부를 돕기 위하여 호랑이굴처럼 매우 위험한 고국에 잠입하여 동지들을 모으고 자금을 모금 하시다가 일제밀정에 탐지(탐실)되어 남대문밖에서 대치하게되자 홀로 왜경 여러명을 살퇴시키고 맨발로 백설이 덮힌 수삼십리길을 오가면서  적의 시선을 피하시다가 마침내 효제동의 은신처가 드러나 하루밤 사이에 서울의 모든 경관들을 총출동시켜서 기마대까지 포위사격 하였으나 열사는 권총으로 맞싸우며 사살하다가 최후일탄으로 자결하시어 오랜 세월 잊지 못할 원통함을 머금고 최후를 마치시니 수천 일제경찰은 감히 가까이 못하고 사격이 멈춘 잠시후에 비로소 열사의 순국하신 자리에 다가가서 존경의 예를 표하였고, 그 충성과 담력 그리고 정의를 향한 뜨거운 열정은 세계를 진동케 하였습니다. 아아! 중국 항주의 여관에 보관하였던 그해 12월1일자인 마지막 편지( 김의사가 보낸 것)와 남긴 사진을 전쟁중에 일본경찰에게 압수되고 말았습니다. 수십 년 가까이 적과 우리 사이의 간사하고 악한 무리를 숙청코자 할 때마다 뜨거운 눈물로서 추모하는 감정은 말할 수 없었으며 더욱 36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온겨레의 여분 여익하는 이 모양을 보고 치 못하고 간악한 도적무리를 제거하고 응징하지 못하야 나중 죽는 자의 책임을 절반도 못하는 이 사람의 비통한 마음을 감히 다 드러내지 못하오나 오의 영혼(정영)은 살펴받아 주시기 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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