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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가전 승리’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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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1-09-13 조회 : 7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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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가전 승리’의 의의
   
                                                      윤  우      (  현,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고문)

1.  일제의 기만을 세계에 폭로

    김상옥 의사가 서울 시가전(1923.1.)에서 승리하고,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만든 시기는 우리민족 전체가 궐기해서 독립을 외치고 선언한 3․1독립운동(1919.3.)이 일어난지 3년여가 지난 후이다. 일제가 세계에 대해 한창 기만 선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3․1독립운동을 마치 일부가 일으킨 소요사건 인양 축소 은폐하려 했고, 또 마치 평화적으로 원만히 수습했고, 그래서 평온을 되찾았으며 또 한국 민족이 일제의 새로운 ‘문화정책’에 크게 호응하고 있는 양 기만 선전하고 있었다.  따라서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서울 한복판의 시가전, 그것도 5일 간격 3차례의 시가전은 한민족의 항일 투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널리 알리는 한편, 일제의 선전이 기만임을 폭로한 것이며, 특히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과시하고, 동시에 일제의 국제사회 신인도를 낮춘 효과를 거둔 의거이다.


2.  3․1운동 후 침체된 독립운동에 활력소 작용

  1919년의 3․1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사상 가장 대규모의 민족운동이었고, 민족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비폭력 독립항쟁’이었다. 민족사적으로는 선언된 독립의 실체인 대한민국(임시정부)을 탄생시켰고, 즉 민족사상 첫 공화제 민주국가를 ‘건국’했고, 의병이 독립군으로 전환된 무장 항쟁을 고무 확산시켰다. 또 세계사적으로는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사타하그라하 운동’,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 등의 독립운동을 고무시켰다. 그만큼 중요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크게 분출된 겨레의 에너지가 계속 분출될 수는 없었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일제측이 보기에는 독립 기운은 가라앉고 그들의 이른바 ‘문화정책’에 호응하는 것으로 착각할 만큼 독립운동이 침체되어갔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김 의사의 의거는 식어가던 독립열기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독립의지를 북돋운 것이다.
 

3.  서울 유일의 ‘항일 승리 역사’ 창조
 
  서울은 우리나라 수도인데도 숱한 외적의 침입을 받았다. 그런데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침략자를 타격한 승리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서울에는 ‘승리’의 사적이 없다. 더구나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겼던 일본의 침략에 대항한 사적이 별로 없다.
  독립유공자 각각의 공적을 선양하는 기념물은 좀 있는 편이지만, 집단으로서의 공헌이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시설은 적은 편이다. 중랑구 망우공원에 있는 ‘13도 창의군 탑’이나 서대문 형무소 터의 ‘순국선열 추념탑’, 효창공원의 ‘7위 선열 묘역‘, 국립현충원의 임시정부 묘역과 ‘독립군무명용사 위령탑’, 서대문의 ‘경교장’ 등이 있을 뿐이다.
  더구나 항일 승리 사적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승리한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상옥 의사의 1923년 서울 시가전은 ‘승리’가 분명하고, 특히 마지막 격전장인 종로구 효제동 72번지 주변은 통쾌한 승리의 현장이다. 뿐만 아니라 ‘민족 수난처’인 서대문 형무소 터(서쪽)에 대칭되는 ‘항일 민족 승리 터’(동쪽)로 자리매김 되는 것이다.


4.  독립군의 부대단위 승첩과 동격

  김상옥 의사의 서울 시가전은 그 시기와 장소적 특성에 비추어 볼 때, 만주 독립군의 부대 단위 승첩에 비견되는 승리요 효과를 지니는 것이다. 첫째로 시기적 특성을 보면 3․1독립운동 3년여 후의 대규모 항일 실력 항쟁으로써, 일제가 세계에 대해 한민족의 3․1운동을 마치 평온하게 수습한양 기만선전 하던 때 그것을 폭로한 중요 시점인 것이다.
  둘째로 장소적 특성이란 서울 한복판 즉, 일제 식민통치의 심장부라는 점에서, 또 당시 여러 나라의 영사관과 외국계 종교 단체와 외신 등이 상주하고 있는 서울이라는 점에서 세계에 대한 파급 효과가 만주의 승첩 보다 오히려 컸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따라서 김 의사의 서울 1923년 시가전 승리는 만주의 독립군이 부대 단위로 거준 승첩에 못지않은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다.
 

5. 일제 식민통치권력을 흔든 쾌거

  김상옥 의사의 1923년 서울 시가전 승리는 비록 김 의사 홀로 펼친 시가전 이었지만, 일제 식민지 통치기관 전체를 대상으로 한 실력 항쟁이었던 것이다.
  당시 일제는 만주지역과 상해로부터 무장투쟁 요원들이 본국에 잠입했다는 그들 정보망의 보고에 따라 경계를 강화하고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때에 펼친 것이었다. 더구나 종로경찰서 피습(1.12)을 계기로 사실상의 ‘계엄 사태’에 놓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1919년 3․1운동 때의 ‘계엄’을 풀었다가 다시 조인 형국이었다. 실제로 효제동 전투 때(1.22.)의 군. 경 1,000명 투입, 4중 포위는 사실상 ‘계엄군경’의 대처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김 의사의 시가전은 김상옥 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겨레 모두의 힘을 합한 항일 시가전과 같은 것이며, 일제 식민통치기관 전체를 상대로 한 승리요 쾌거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6.  의열 투쟁의 위력 발휘

    김 상옥 의사는 학생운동, 물산장려운동, 애국계몽운동, 3․1운동, ‘혁신공보’ 발간, 비밀결사 조직 등을 통해 독립투쟁을 전개하면서 좀 더 강력한 실력행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후반부터 즉 ‘혁신공보’ 발간이 어렵게 된 상황에서 무력(폭력)투쟁 방향에 무게를 두게 되었고 그 결과 1920년 암살단과 결사대의 대규모 의거를 계획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의거가 일제의 예비검속에 의한 동지들의 피검으로  좌절당한 후, 김 의사는 상해로 망명하게 되었지만 당초의 목표 실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상해에서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담하게 된 것도 김의사의 투쟁노선과 부합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 의사가 약산 보다 8년 연상(1890 : 1898)일 뿐 아니라, 의열투쟁 면에서도 이미 1913년 광복단 가입-1916년 조성헌병대 기습과 친일파 처단 등 선배인 점을 고려할 때(약산의 의열단 결성은 1919년) 김상옥 의사의 의열단 가담은 일반적 가입과 달리 지도적 입장의 가담이었다고 하겠다.
  어떻든 김상옥 의사의 1923년 서울 시가전은 비록 김의사 1인의 활동이었지만 그 규모나 시기, 유일한 ‘일제 하 서울 한복판의 시가전’이었다는 점, 그리고 파급 영향 등을 고려할 때 의열투쟁의 위력을 크게 과시한 항일투쟁이었던 것이다. 



 7.  모든 독립투사들의 고초와 비분을 보복한 쾌거

  김상옥 의사가 폭파한 종로경찰서는, 서울(경성)경찰국이 별도로 없고 경기도 경찰부 소속으로 되어 있던 서울 시내 경찰서 총4개 중 독립운동 탄압 전담 경찰서였다. 그래서 일제에 체포된 독립투사와 가족. 친지들의 대부분이 그곳을 거치게 되어 있었고 가장 혹독한 고문과 만행을 저지른 곳이었다.
  김상옥 의사 자신도 3․1운동 직후 ‘혁신단’사건 등으로 그곳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고 노모와 처 , 아우 내외 등 가족 모두와 동지들이 고초를 겪은 곳이다. 특히 여성 동지 장귀동은 종로서의 고문 후유증으로 결국 숨을 거둔 경우이다.
  따라서 비록 완파는 아니었지만, 일제가 혼비백산했을 정도로 김 의사가 종로경찰서를 폭파한 것은 모든 독립투사들과 가족 친지들의 원혼을 달래고 보복한 쾌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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