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묘지로 이장하여 안장-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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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1-09-13 조회 : 1,076본문
김상옥 의사의 묘소는 가족들이 자주 성묘하는 것 등을 못 마땅히 여긴 일제의 계속된 강압 때문에 1940년 부득이 이문동 공동묘지를 열어 화장해서 절에 모셨었는데 1962년에 이르러서야 국립묘지로 이장했다.
< 언론인 유광열씨는 >
"세월이 흐르고 계절이 흘러서 그 이듬해인 1924년의 봄은 이 불행한 가정에도 찾아왔다. 한식에 사초를 하여 놓은 무덤에 정여사는 제물을 머리에 이고 소복을 한 대로 앞을 서고 육순의 늙은 시어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뒤를 따라 가면서 노인은 아들을 부르고 자녀는 아버지를 부르고 정씨는 남편을 부르고 마음껏 울던 광경도 어제같이 눈에 선한데……" 라는 감동적인 글을 「한국일보」에 쓴 바 있다.
우리의 의로운 선구자요, 행동하는 애국자인 김상옥 의사가 간지 스물세해만인 1945년 8월 15일 김 의사가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조국광복이 이 산하에 찬란한 햇살 되어 찾아 왔다.
좌우세력의 대립, 친일 세력의 재등장, 6.25의 피비린내 나는 민족 상잔으로 겨레의 진정한 애국자인 김상옥 의사 등 순국선열에 대한 국가적 국민적 예우가 소홀하더니 뒤늦게나마 미아리 공동묘지에 방치해 두었던 김상옥 의사의 유해는 1962년에 국립묘지에 이장했다.
그 해 1962년 정부는 김상옥 의사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여 고인의 높은 뜻을 기리기에 이르렀다.
< 언론인 유광열씨는 >
"세월이 흐르고 계절이 흘러서 그 이듬해인 1924년의 봄은 이 불행한 가정에도 찾아왔다. 한식에 사초를 하여 놓은 무덤에 정여사는 제물을 머리에 이고 소복을 한 대로 앞을 서고 육순의 늙은 시어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뒤를 따라 가면서 노인은 아들을 부르고 자녀는 아버지를 부르고 정씨는 남편을 부르고 마음껏 울던 광경도 어제같이 눈에 선한데……" 라는 감동적인 글을 「한국일보」에 쓴 바 있다.
우리의 의로운 선구자요, 행동하는 애국자인 김상옥 의사가 간지 스물세해만인 1945년 8월 15일 김 의사가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조국광복이 이 산하에 찬란한 햇살 되어 찾아 왔다.
좌우세력의 대립, 친일 세력의 재등장, 6.25의 피비린내 나는 민족 상잔으로 겨레의 진정한 애국자인 김상옥 의사 등 순국선열에 대한 국가적 국민적 예우가 소홀하더니 뒤늦게나마 미아리 공동묘지에 방치해 두었던 김상옥 의사의 유해는 1962년에 국립묘지에 이장했다.
그 해 1962년 정부는 김상옥 의사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여 고인의 높은 뜻을 기리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