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사람을 존중했던 독립운동가, 김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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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5-04-30 조회 : 360본문
"일하는 사람을 존중했던 독립운동가, 김상옥"
김상옥,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노동조합(공인조합) 설립
1912년 10월, 김상옥 의사는 서울 창신동 493번지에 위치한 어린 시절 대장간에서의 얻은 경험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영덕철물점’을 개점하였다. 그의 사업 수완은 곧 한국 경제의 일본 의존도가 심화되는 시기에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정부는 상투를 자르도록 1차 단발령을 내렸고, 이는 전국적으로 의병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이후 1902년 재차 단발령이 시행되면서, 김상옥은 한국 경제가 일본에 예속되는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이 시기, 물가 상승으로 서민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그는 저렴하면서도 뛰어난 디자인과
품질을 갖춘 말총 모자 제작에 성공하였다. 한국산 말총 모자를 착용하는 것은 애국심의 표현으로 여겨졌고,
이는 남성 복식의 유행으로 자리 잡았다.
김상옥은 자신의 생산 활동이 단순한 수익 창출을 넘어 일본과의 경제 전쟁에 기여하고 있음을 깨닫고,
양말과 수건 등 소비재 제조에도 손을 대었다. 그는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애국 애족의 길임을 강조하며,
문맹 직원들에게는 야학을 제공하여 교육의 기회를 마련하였다.
또한, 그는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조합(공인조합)을 설립하여 서로의 권익을 지키고, 처우 개선에 힘썼다.
김상옥은 모자뿐만 아니라 양말, 농기구 등도 대량 생산하며,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는
50여 명의 직원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결의를 다졌다. 일본 물품과 일본제 모자를 사용하지 말자.
일본어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 물품 사용의 해악을 널리 알리자.
그는 제조업 주인들을 모아 동업조합을 결성하고, 일제의 경제 침탈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자 하였다. 또한, 동업자들을 중심으로 백영사를 조직하여
일본어 사용 금지, 금주, 금연 운동을 전개하고, 미주에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민족운동에도 기여하였다.